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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Nov 18. 2018

하나도 안 괜찮아@이별한 사람들


괜찮냐고 물었다. 그리고 모두 나를 위로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너의 가치를 발견해주는, 더 너와 잘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근데, 난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만 괜찮아지는 걸까.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랑스러운 커플들을 볼 때, 영화 속 주인공이 나와 너무 같은 상황일 때, 이별 음악을 들을 때, 너와 비슷한 사람의 뒷모습을 볼 때, 우연히 우리의 추억을 발견할 때, 


그러다가 그냥 비가와도,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길을 걸어도, 아침에 눈을 떠도, 

그렇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시도 때도 없이 네가 생각났다. 

계절이 바뀌고, 우리가 만났던 계절이 다시 돌아왔는데도. 

난 그 자리 그곳에 그렇게.

가만히.

내가 바랬던 건, 그냥 네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을 느끼는 것. 그거 하나. / 영화 이프온리
책 - 보통의 존재(이석원) / 너라는 계절(김지훈) / 계절을 너에게 배웠어(윤종신)

#1. 더 아파했다.


친구들이 위로를 해줘도 내 마음은 좀처럼 괜찮아지지 않았다. 잘한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봐도 공허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답답했다.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별을 극복하는 걸까. 이 차오르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친구들에게 아무리 하소연을 하고 위로를 받아도 그때뿐이었다.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언제까지나 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며 "나 좀 위로해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노래에서. 그리고 책에서. 그렇게 내 감정을 온전히 그 시간에 쏟고 나니 집중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괜찮아졌다.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적어도 내 마음과 같은 사람이 이곳에 있기는 하구나.' 하고 말이다. 그러다 슬픈 장면들과 글을 발견하면 울었고 또 행복하고 기쁜 순간들이 떠오르면 웃으면 되었다.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을 때,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시간에 그것들을 찾았다. 영화, 노래, 책. 내 요동치는 감정들을 그것들로 더 요동치게 만들어 버렸다. 


그 사람은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 영화 꾸뻬씨의 행복여행

#2. 그와 나를, 그때를 돌아봤다.


모든 감정을 눈물로 쏟아내고 나니 더는 나에겐 감정이라는 게 없어져 버렸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와 나를, 그때를 돌아볼 수 있었다. 문득 대학교 시절 존경하는 교수님이 흘러가듯 해주셨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를 만날 땐,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여야 한다. 너희들이 힘든 상황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함께 힘들 것이고, 행복할 때 행복한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좋은 관계로 이어나갈 수 있다. 절대로 힘든 상황을 피하려고 누군가를 만나지 말아. 상대방이 행복했던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 관계는 지속해서는 안돼." 


결국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서 헤어졌다. 마음이 변해서든, 상황적인 이유든 간에. 더 이상의 상황 분석은 의미가 없었다. 그 사람 때문에 난 그때, 그리고 지금 힘들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더라도, 결론적으로 날 아프게 만든 사람. 그게 사실이었고, 중요했다.


#3. 나를 찾아야 했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매일매일 그 사람 생각에 눈물 나던 시간은 다행히 지나간 것 같았다. 평일엔 정신없이 일했지만, 금요일 퇴근 시간이나 주말엔 어김없이 그 사람 생각이 났다. 그렇게 침대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다가 불현듯 거울 속에 비친 내가 한심해 보였다. 예뻐 보이지 않았다. 물론 평소에도 예쁜 모습은 아니기에 적어도 여기서 더 못나지면 안 된다. 근데 바보 같고, 미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곳엔 내가 없었다. 사랑하고, 이별의 시간을 겪어내고 있는 내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뭐라도 해보자.' 결심했다. 그런데 그 '뭐'가 '뭐'인지 잘 모르겠는 거다. 이렇게 붕 뜬 시간에 난 혼자 무엇을 해야 할까. 오랜 생각 끝에 영어 회화를 시작했다. 내 숙원사업이기도 했고, 언제나 내 영어 실력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1:1 영어 회화를 했다.

 그리고 난 여러 질문을 받았다. "취미는 뭐예요? 어제는 뭐 했어요? 일주일간 무슨 일이 있었어요? 어떤 시간을 가장 좋아하세요? 오늘 과외 끝나고 뭐 할 거예요?"부터 "행복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행복하세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같은 철학적인 질문까지. 철학적인 질문은 그렇다 치자. 난 왜 일상적인 질문에 영어는 물론이고, 한국말로도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을까. 답은 간단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난 나를 찾아야만 했다.


그냥 '나'는 '나'이고 싶어요. / 영화 500일의 썸머
책 -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케이트 디카밀로) / 태도에 관하여(엄경선)

#4.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싶어졌다. 기필코 나 혼자서도 정말 잘! 괜찮게 지내고 싶었다. 앞으로 내게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에 푹 빠진다면 그 집중하는 시간만큼은 힘들지 않을 수 있으니까. 내게 취미를 찾는다는 것은 힘든 상황을 버텨내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보험이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는 것 같은 사람들이 내 레이더에 들어왔다. 그러다 나와는 다르게 여러 취미활동이 있는 친구의 삶이 문득 궁금했다. 색이 뚜렷해 보이는 친구와 우연히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겪어보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자연스레 지금 난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니, 자기만의 세상이 뚜렷해 보이는 친구와 함께 이것저것 해보면서 나를 알아갔던 것이다. 난생처음 캠핑도 해보고, 스키장도 가고, 분위기 좋은 카페들도 찾아다니고, 아무런 계획 없이 여행을 가기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운동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 친구의 "글도 한번 써봐. 할 수 있어."라는 제안에 브런치까지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글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도 많을뿐더러 '밑져야 본전이다.'라고 생각했던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다. 운 좋게도 여러 SNS에 나의 글이 노출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나만의 방식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난 브런치에 글 쓰는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서. / 영화 i feel pretty


#5. 그를 놓아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나만의 시간을 가졌고, 그 시간을 통해 내 색이 조금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내가 나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해봤다. 


너무 당연한 말이고 진부한 말이지만, 나라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밖에 없고, 아주 느리지만 천천히 나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런 내가 괜찮아 보였다. 친구들의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가 맞았다. 근데 그 말에는 한 가지 조건이 달려있었다. 바로 '이별 후,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충분히 갖는다면'이었다.


분명 난 이별을 통해 더 단단해진 마음을 가졌고, 나를 조금 더 잘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이별을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난 지금처럼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니, 확실히 나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색은 무채색이었을 테고, 그 사람에게 온전히 나를 맞춘 채 그렇게 내 상황을 탓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를 내 마음속에서 놓아주기로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테니까.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 모든 선택들을 후회하지 않아. / 영화 빅식

#6.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를 놓아주고, 조금은 이기적으로 나만의 시간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지 않으려면 나를 사랑해야 해.'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힌 것이다. 그리고는 항상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나의 색이 더 선명해져야 해. 나를 잃지 말아야 해. 꼭 혼자서도 괜찮은 시간을 보내야만 나중에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져도 그때처럼 힘들지 않게 보낼 수 있어.' 이렇게 말이다.


누군가를 다시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기도, 또 한편으로는 무서운 일이기도 했다. '또 같은 시간의 반복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내 마음 어딘가에 깊숙이 자리 잡아 쉽사리 사라지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헤아려주려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지난날의 선택과 시간을 존중해줄 것 같은 사람. 지금의 내 모습 그대로의 나여도 괜찮다고 예쁘다고 해줄 것 같은 사람. 그 사람의 마음, 또 앞으로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이제 난, 지난날의 내가 내린 선택과 힘들어했던 시간들, 그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나만의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랑'해요.
책 -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류시화) / 시 - 방문객(정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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