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나는 제주
함덕. 여름날 제주 바닷가 가운데 사람이 가장 많은 곳. 요즘엔 협재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이기도 할 텐데 오랫동안 함덕 바닷가가 더 널리 알려졌다.
함덕 바닷가는 바다로 열린 폭이 좁다. 항아리처럼 작고 예뻐 아늑하달까. 하여 사람 많을 땐 짝과 벗과 내 걸음과 마음이 주춤주춤. 가까운 동쪽 김녕으로 가거나 아예 서쪽 곽지과물, 더 멀리로는 협재까지 뛰기고 했다.
그러다 만난 게 함덕 바닷가 옆으로 넓게 트인 풀등. 썰물 때에 맞춰 가면 널리 알려진 함덕 바닷가보다 네댓 배쯤 넓은 모래밭이 드러난다. 사람 드물고. 짝과 벗과 나는 거기를 “왼쪽 함덕”이라 부르며 드러누웠다. “여기가 오른쪽보다 더 좋다”며. 하늘 바라보고 누웠다 엎어져 등에 해 올렸다 일어나 바다에 들어갔다 했다.
“물 빠졌다! 와··· 저 바다 색깔 좀 봐. 빨리 가자.”
아침부터 왼쪽 함덕으로. 2009년 팔월 27일 목요일 아침나절. 바다 쪽으로 얼마나 더 멀리 걸어갈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게 아득했다. 짝과 벗과 나를 넣고도 사람은 예닐곱. 드넓은 바닷가에 누울 줄 아는 사람들.
“물 들어온다. 와··· 저기 저 먹구름 좀 봐. 비 올 것 같네.”
밀물에 조금씩 밀려 ‘오른쪽 함덕’에 가까워진 짝과 벗과 나는 초승달처럼 좁아진 ‘왼쪽 함덕’ 바닷가에 머물 수 있을 마지막까지 버텼다. 점심나절도 채 되기 전에. 먼 바다에서 바닷가로 몰려온 먹구름은 소나기를 품은 게 틀림없어 보였다. 짝과 벗과 나를 홀딱 적실 기분 좋은 비. ‘한데 바람이 좀 세차다.’
“으아··· 하하하, 이거 장난 아닌데.”
먼 바다에서 바닷가로 몰려온 먹구름이 품은 소나기는 억수였다. 어마어마하게 퍼붓는. 나는 짝과 벗에게 “안 되겠다. 잠깐 들어갔다 나오자.” 잘 버티던 벗도 새까만 하늘에서 억수처럼 비 쏟아지고 바람 세차니 조금 당황한 듯 끄덕끄덕. 짝과 벗과 나는 주섬주섬 그늘막과 돗자리 따위를 접어 들고 빗속 ‘왼쪽 함덕’ 방파제 둑으로 올라선 뒤 묵는 집으로 걸었다.
“용오름이다! 저기 저, 저거 용오름이야.”
바람 불어온 쪽 먼 바다 먹구름이 물 빨아올린 모습. 바다 표면에서 하늘에 닿은 크나큰 소용돌이. 내가 먼 바다로 눈 돌렸을 때 물에서 치솟아 한 차례 굽은 소용돌이가 막 구름에 닿았다.
짝 물음. “저게 뭔데? 용, 뭐라고?” 내 대답. “용오름. 센 바람이 하늘로 휘돌아 솟으면서 물까지 따라 올라가는 거야. 배가 저 밑에 있으면 휘말려 뒤집힐 수도 있을 걸, 아마. 나도 살면서 이게 두 번째인지 첫 번째인지 모르겠다. 맨눈으로 본 거. 어릴 때 어디선가 한 번 본 것도 같고 꿈꾼 것도 같고.”
“무섭다. 여기로 오면 어떡해!”
짝은 걱정했고 벗은 말없이 걸었으며 나는 하하 웃었다. “세상에 용오름을 다 보네” 하며. 짝과 벗과 나는 ‘억수같은 빗속 저 멀리 용오름 솟은 그해 왼쪽 함덕’을 잊지 못한다.
그날 밤. 묵는 집 앞 ‘왼쪽 함덕’ 방파제 둑 위. 짝과 벗과 나는 돗자리 깔고 앉아 까만 바다를 바라봤다. 조용히. 소주 한 병과 맥주 두 캔과 탄산 음료 하나와 가벼운 먹을거리 들과 함께. 저만치 떨어진 곳엔 왼쪽 함덕 마을 여성 여럿이 나와 앉았고.
한낮 억수 같던 비와 용오름을 잊고 거짓말처럼 고요한 바다. 여름밤 물속이 더웠을까. 몸매 날렵한 물고기 한 마리가 바닷물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가 퐁 들어갔다. 한 번으론 심심했는지 연거푸. 폴짝 까만 밤에서 퐁 꺼먼 바닷속으로. 아니, 잠깐, 생김새가 비슷한데 혹시 같은 물고기였을까.
“왜 저런다냐. 어서 나와.”
“놔둬. 헤엄 잘하는데, 뭐. 예전엔 다 밤에 했잖아.”
“아, 좋다. 들어와. 시원하다.”
‘왼쪽 함덕’ 동네 여성 셋이 주고받은 말. 댓 명이 나란히 앉아 여름밤 무더위를 삭이는 듯했다. 짝과 벗과 나처럼. 고즈넉했다. 칠석 ━ 2009년 팔월 26일 ━반달처럼.
팔월 마지막 주에 제주에 가려 애쓴 건 까만 밤 때문이기도 했다. 여름 제주 즐기는 사람이 많이 줄어든 밤. 어디나 조용했다. 여름이되 곧 가을 올 걸 느끼는 밤.
함덕 바닷가가 그랬고, 금능 바닷가도 좋았다. 가만히 앉아 거기 그냥 철썩 들붙고 싶었지. 불 밝힌 ‘오른쪽 함덕’ 밤바다에 들어가기 보기도 했고. 밤에도 들어갈 수 있게 등불 밝혀 열어 둔 날에. ‘제주에선 오래전부터 밤바다에 들고는 했다지. 밤바다가 이렇구나. 어릴 적 여름밤 (금강 위쪽 물줄기) 남대천에서 멱 감던 생각이 난다.’
구엄포구가 말할 것도 없이 좋았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서귀포 쪽 중산간 트레블러스호텔 ━ 지금은 사라진 곳 ━ 과 바닷가도 그랬다. 어디나 저 멀리 점점이 보이는 고깃배 불빛. 나란히 한치를 꾀듯 짝과 벗과 나를 홀렸다.
하여 팔월 말 제주 까만 밤이 좋을밖에. 달리 재 보거나 생각할 게 없었다. 팔월 말에 자꾸 맞출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