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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 카페인 Oct 05. 2023

신혼 2년차에 내 집 마련

내 집 마련 : 프롤로그

지금 집은 결혼 후 세 번째 집이다.


첫 집은 온수역 근방의 아파트였다. 그때 회사가 7호선을 타고 고속터미널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면 되는 위치여서 7호선 종점인 온수역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은 노선 연장으로 온수역이 종점이 아니다)

회사까지는 1시간 정도 시간이 걸렸는데, 온수역에서 타면 고속터미널역까지는 앉아서  수가 있었다. 아침 7시 반 정도에 나오면 30여분을 쭈욱 앉아서 올 수 있어서 나름 괜찮았던 거 같다. 집에서 역까지는 10여분이 걸렸고, 집이 역보다 위에 있어서 (30도 정도 경사) 퇴근길이 유난히 힘이 들긴 했다. 그 집에서 전세 기간 2년을 꼬박 채우고 살았다.


당시 전세가가 1억 4천이었다. 2008년, 서울 근교의 수도권 아파트. 1등급 브랜드 아파트는 아닌 10년 이상된 27평 아파트의 9층.  살기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리는 주로 7호선 온수역을 이용했지만 1호선 역곡역과도 가까웠다. 어쩌다 역곡역을 이용한 날에는 집으로 오는 길에 있는 역곡시장을 구경 삼아 걸었다. 당시 역곡역에 회사 사람이 한명 살았는데 그 분과도 종종 만나며 식사를 하기도 했다. 2년을 살면서 맛집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집 근처 순댓국집은 우리 엄마아빠도 인정한 맛집이었고, 온수역 근처에는 유명한 연탄구이 고깃집도 있었는데..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위층에는 3-4살쯤 될듯한 남자아이가 살았다.  고요한 주말 오전에는 어김없이 쿵쾅쿵쾅 소리가 났는데, 소리의 크기만큼이나 속도감이 있었다. 아이 딴에는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는커녕 고만한 조카조차도 없어서 아이들은 집안에서 걷기보다는 뛰기를 한다는 사실을 알리가 없었다. 그래서 '왜 이렇게 뛰어?'가 아니라 '왜 걷지 않지 않고 뛰어갈까'가 더 궁금했었다.


이런 우리에게 아이의 뛰는 소리는 거슬리기보다는 '신기함'의 대상이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위층 아이를 만나면 얼굴에 귀여움으로 무장한 개구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아이 엄마는 우리를 보면 항상 "시끄럽죠?"라는 말을 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마다 우린 "아니요 전혀요!"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한 번은 물어봤던 거 같다.

"근데 아이가 집에서 '왜' 뛰는 거예요?"


진짜 궁금했던 거다. 집에서 무슨 놀이를 하나. 그게 아니면 왜??

내 아이를 키우는 지금에서야 그 질문이 바보스러웠다는 걸 안다. 아이들은 이유가 없다. 그냥 뛰는 거다. 그 아이도 그저 본능대로 움직였던 것이다.

윗집 아이는 정말 매일 전속력으로 뛰었고, 그 소리가 안 나면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로 익숙해졌다.


우리 아래층에는 4인 가족이 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야 집에 들어오는 우리가 아래층과 만날 일은 거의 없었으나 2년 동안 사는 동안 딱 두 번 아래층 아저씨가 우리 집 벨을 눌렀다.

한 번은 요리를 하면서 마늘을 찧는데 그걸 싱크대가 아닌 부엌 바닥에 두고 했던 게 문제였다. 바로 까서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는 마늘을 최대한 잘게 찧어보겠다며 열심히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데, 급하게 벨이 울렸다.

아래층 아저씨였고, 대체 지금 우리 집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물으셨다. 마늘을 찧고 있다고 하니, 그걸 바닥에 두고 하고 있냐며 그럼 아래층은 천둥번개가 치는 듯한 굉음이 들린다고 하셨다. "아, 생각 못했어요. 죄송해요 ㅠㅠㅠ" 거듭 사과를 하고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느 주말 아침, 우리 집 벨이 또 울렸다. 아랫집 아저씨였다. 지금 우리는 그저 언제 침대에서 내 몸을 떼느냐만 고민하고 있는 찰나인데, 왜 오신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아침에 알람을 진동으로 맞추고 계시죠? 그거 안방 창틀에 두시나요? 그 진동이 우리 집까지 전해져요. 매일 아침 6시부터 10분 간격으로 울리잖아요. 어제 아침은 더 늦게 일어났고."


이럴 수가. 본의 아니게 우리의 아침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또 "죄송해요ㅠㅠ"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안방은 베란다와 이어지는 창틀이 침대 높이만큼 높이 올라가 있어서 그 위가 딱 대폰을 두기에 편했다. 그래서 잠들기 전 휴대폰을 보다가 그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자곤 했다.


대부분의 날을 그렇게 보냈는데, 아랫집 아저씨는 얼마나 참다 참다 올라오신 걸까.


전세 계약기간이 끝나갈 무렵 집주인은 전세가에 3천을 보태서 이 집을 사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우리가 1억 4천에 살고 있으니 매매가 1억 7천을 제안하신 거다. (지금 시세를 확인해 보니 그 집이 4억 5천~5억 2천대이다)


집을 산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던 거 같다. 대학 입학을 하면서 서울에 왔고, 학교 앞 원룸에 월세를 살다가 전세로 옮겼고, 취업을 하면서 회사 근처에서 전세를 살았다.


학교 앞에서 두번째 집을 전세 알아볼 때, 한 부동산 사장님이 돈을 조금 보태서 아예 집을 사는 건 어떠냐며 제안하신 적이 있다. 전세가크게 차이가 없는 괜찮은 매물이 하나 있다며. 담인 줄 알았다. 학생에게 집을 사라니.  '어떻게 집을 사요?' 라고 물을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나에게 집을 산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고, 무서운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당시 나는 고작 스물두살이었으니까. 


집주인아주머니의 제안도 그렇게 느껴졌다.

이 집을 사라고?

헌데 그게 시발점이 됐다. 집을 산다는 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첫 순간. 당시 나이가 스물아홉이다. 남편은 서른.


남편은 나보다 빨랐다. 시부모님이 집을 사고팔기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집으로 늘려왔고, 그 후로도 원룸 건물을 운영하시면서 부동산 시장을 가까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렴풋이 보고들은 게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빠삭했고 실제로 집을 알아보러 다닐 때에는 나보다 훨씬 어른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집을 사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집을 산다는 건, 지금도 큰 일이지만 당시 결혼 2년 차, 직장생활 4년 차의 나에겐 더 크게 느껴졌다. 어디를 살까(buy), 어디에 살까(live)를 동시에 고민해야 했고, 그 고민이 '시세'라는 현실 앞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도 수차례 깨닫게 됐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 광명시 '철산'이었다. 친한 친구가 광명 토박이라 이미 익숙한 동네였고, 7호선 지하철을 타면 늘 지나는 곳이라 이쯤이어도 좋겠다 싶었다. 인서울은 힘들지만, 서울로 몇 발자국 가까워지는 느낌. 당시 우리에겐 온수역과 비교해 철산역은 신도시 느낌이었다. 온수역에서 철산역으로만 옮겨도  성공한 느낌.




그렇게 철산역 근처의 집을 알아봤다. 그리고 두 집을 만나게 된다!



(다음 이야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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