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한 때 맥시멀리스트였다
공부하며 썼던 모든 자료와 책을 침대 밑에 보관해 둔다. '혹시' 나중에 다시 들춰볼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지난 세일 시즌에 샀던 맞지 않는 옷들도 일단 옷장 속에 보관한다. '언젠가' 입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남에게 주면 되겠지. 펜은 서랍 속에 이미 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색상이니까 사본다. 다른 펜들은 '나중에' 쓰게 되지 않을까?
3년 전 나는 혹시, 언젠가, 나중에 쓸지도 모른다며 물건을 쌓아놓고 살던 맥시멀리스트였다. 서랍장 2개에 책장 3개도 모자라, 침대 밑에 수납공간을 만들고, 옷장 속 아래위로 모든 물건을 구겨 넣고 살았다. 그럼에도 세일이니까, 여행 다녀온 기념으로, 여기서밖에 못 사니까,라는 이유를 붙이며 더 많은 물건을 밖에서 들여왔다. '리미티드 에디션'이란 말은 너무나 매혹적이었고, 물건이 나를 표현해 준다는 생각에 굿즈를 열심히 모았다. 밖에 나가면 다이소와 SPA 브랜드는 꼭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그렇게 물건에 둘러싸여 논문을 쓰던 중, 한 책을 만났다. 사진 속 세면대와 책상,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올려지지 않은 모습은 내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샤워 후 커다란 목욕타월 대신 손바닥만 한 수건의 물기를 짜가며 몸을 닦는다는 문장을 읽었을 땐 '뭐 그렇게까지 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결국 나는 그 심플함에 매료되었고, 정리쯤이야 금방 실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내가 읽었던 내용이 '미니멀리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서점과 도서관에 있는 모든 미니멀리즘 책을 다 뒤져서 읽고, 유튜브에서 각종 미니멀리즘 콘텐츠를 찾아봤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엔 <미니멀리즘> 다큐멘터리까지 3번씩이나 돌려봤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었다. 늘 '둘 다 좋아!'라고 외치던 나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지 선택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치 이상형 올림픽처럼, 검은색과 회색, 남색, 그리고 연청 중에 어떤 색 청바지가 옷장에 남을지 하나씩 제외시키는 일이 처음엔 가슴이 아팠다. 토순이도 계숙이도, 모든 인형은 나와 함께 이사를 가야 한다며 떼를 쓰는 아이처럼 내 욕심이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미니멀리즘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 계절 동안 커다란 박스에 격리시켜 놨던 물건들이 생각조차 난 적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가 살아가는 데에 그렇게 많은 물건이 필요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랍을 뒤집어 '당신은 저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를 몇 달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내 취향과 가치관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렇게 비움은 나의 취미이자 일상이 되었다. 가끔은 중독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요새 뭐 하면서 지내냐'라고 물어보면 '물건 버린다'라고 답했다. 사실이었으니까.
밤마다 맥주 한 캔을 들고 '오늘은 어디를 뒤집어볼까'라는 말을 하며 쓰레기봉투 하나를 가져와 열심히 비워내면 뿌듯함마저 들었다. 20리터 쓰레기봉투 5개와 100리터 쓰레기봉투 3개는 족히 나왔던 것 같다. 물건이 급속도로 줄어들자, 가구들도 설 자리를 잃었다. 결국 서랍장과 책장을 한 개씩만 남겨두고 나머지 수납장까지 모두 버렸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어쩌다 미니멀리즘에 중독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당시 나는 한국에 막 귀국한 상황이었다. 내 가치관은 많이 변화해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그런 나를 어색하게 생각하곤 했다. 마치 한국에 온 외국인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은 한국에서 다들 행복하게 사는데, 나만 이곳에서 사는 게 힘들었다. 때로는 아팠다. 내가 잘못 자란 건지, 아니면 이곳이 이상한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곳도 나도 둘 다 죄가 없다. 나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지만, 그것이 지금 내가 살고있는 환경에 맞추기 위한 억지일 필요는 없다. 카멜레온처럼 늘 경계하며 눈에 띄지 않으려고 보호색을 띨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더욱 내 중심은 늘 단단해야 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환경을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이다.
미니멀리즘 덕분에 내 변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굳이 타인을 위해 과거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들이 술술 풀려나가고, 매일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과거에 좋아했던 것을 알되, 그것을 현재와 미래로까지 끌고 가지 않는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남긴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그렇게 줄인 짐이 30kg, 20kg, 그리고 이제는 11kg가 되었다. 한 해동안 미니멀리즘을 하고 나서, '비울만큼 비웠으니 여기서 뭘 더 비울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올해 나는 3번의 이사를 했고, 여전히 무겁게 느껴지는 짐을 옮기면서 정말 내 삶에 필요한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머스트 해브 아이템, 반드시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알고 있던 것들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비움은 끝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3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미니멀리즘을 하고 있다.
이제는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내 삶에 필요한 것들만 소유한다. 그렇게 삶에 불확실성을 버리고 선명한 의식과 목표를 채워나간다.
버스를 타고 이사를 하며 내가 가진 모든 짐을 어깨에 메고 간다. 어깨에 짊어진 이 짐들이 내 삶의 무게라면 여전히 무겁다는 생각을 한다. 늘 그랬듯이 올해도 소유보다는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