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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ie Apr 09. 2020

인간관계 미니멀리즘 : 마음속에도 수납장이 있다면

더 큰 수납장을 사려고 시간을 대출했겠지

"Frankie 씨는 인싸잖아요." 첫 회사에서 들은 말이다. 첫 회사만큼은 조용히 다니려고 했는데 들켜버렸다. 그렇다. 나는 개 같은 사람이었다. 정정해보자면, 나는 고양이보다는 개과 인간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살아왔다. 


처음 쉐어하우스에 살 땐 나에게 꼬리가 있다고 확신했을 정도였다. 룸메이트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내 꼬리뼈가 반응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달려가서 잘 왔다고 박수라도 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정말이다. 잠깐이라도 만난 사람마다 빛의 속도로 페이스북 친구 요청을 했으며, 오전 내내 카톡이 없으면 핸드폰이 고장 난 줄 알았다. 약속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가지는 것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의 미덕이라 여겼다. 


그러던 내가 지금 연락처에는 3명의 번호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중 한 명은 '나'다.) 인간관계 미니멀리즘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베프'라 불리는 친구와 연을 끊게 된 일이었다. 몇 년 동안 모든 것을 공유하던 사람과의 연이 이렇게도 쉽게 끊어지는구나 싶었다. 허무감이 밀려왔고,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베프', '지인', '아는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그 친한 정도를 재단하며 지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얘보다 더 친하고, 쟤랑은 별로 안 친하니까 이러쿵저러쿵. 그런 생각들을 거듭하다 나온 결론은 하나다. 영원한 친구라는 것은 없으며, 자신의 상황과 때에 맞는 연이 있다.


자칭 '프로 인간관계 커터'로써, 수년간 연을 끊는 기준을 다져왔다. 그 기준은 매우 간단하다. 인사고과를 매기는 것처럼 여러 항목을 두고, 재고 따질 필요도 없다. 지금 당장 인사했을 때 반갑게 내 인사를 받아주며 어색함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이인가? 만약 일적인 관계라면,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인가? '아니요'라는 답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삭제한다. 


그럼 욕먹고 다닐 것 같지만, 아쉽게도 여러분의 기대와는 다르다.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것도 물건을 비워내는 과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물건을 버릴 때는 망설이다가, 정작 버리고 나면 나중엔 생각도 안나는 것처럼 말이다. 딱히 연락이 다시 오지 않거나, 반대로 내가 정말 필요해서 연락할 일도 일체 없다. 








악연을 끊어준다는 신사, 교토의 야스이콘피라구




마음속 붙박이장은 우주가 아니다


학교 안의 거의 모든 사람을 다 알고 지내던 선배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정작 본인은 진짜 자기 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메모 앱을 켜서 '페이스북 친구 1000명 만들기'라는 버킷리스트를 조용히 지웠다.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크기는 무한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속 수납장이 있다면 그 크기는 얼마나 클까? 작으려나? 최대 수용인원은 몇 명이지? 페이스북 최대 친구 수가 5천 명이니까 그럼 5천 명까지도 들어갈 수 있을까? 글쎄, 그 크기는 절대 무한대로 늘릴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이 한정되어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누군가를 수납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만나는 모두에게 정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음속 수납장에 공간이 있는 대로 꽉꽉 채워놓으려고 한다. 덧붙여 요즘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SNS에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인 아니겠는가. 내가 이렇게 친구들이 많다. 내가 오늘도 친구들과 잘 지냈다. 


물건을 비워낸 만큼 그 자리에는 경험이 깃든다. 인간관계를 비워내면 새로운 인연과 기회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나를 괴롭히는 관계는 무엇인가, 무의미한 관계는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정의해본다. 나에게는 서로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관계가 나를 병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부정적인 관계를 지워내니 기다렸다는 듯이 새롭고 다양한 인연들이 찾아왔다. 당연한 섭리지만 늘 감사한 일이다. 






우리의 세계는 늘 변화한다


한동안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한번 만나면 하루 종일을 함께했고, 떨어져 있을 땐 전화를 3시간 동안 내리 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애인이 세상의 중심인 듯 이야기하고, 유명인을 향해 걱정과 염려를 하는 것이 멀게 느껴졌다. 그것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친구'라는 이름으로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 연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한 때 정말 친한 사이였고,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그것은 '친구'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왠지 찜찜하고 피곤했다. '오 영원한 친구'를 유지하기 위한 눈물 나는 노력이 점점 나를 갉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그들의 세상과 나의 세계는 ㅅ자를 그리며 멀어져 버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첫 해외생활과 미니멀리즘을 만나며 나의 세계는 통째로 바뀌어버렸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의 상황과 그 세계는 늘 변화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싸우지도 않았고, 서로 차단하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의 세계는 예전처럼 비슷한 구석이 없어진 것뿐이다. 


친구의 상황과 가치관이 달라져서, 그것으로부터 상처를 받거나 고민을 가지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에 대해 친구니까 항상 아낌없이 양보해야 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그것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진다. 


그때 우리는 함께여서 더 행복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 기억을 가지고, 나는 앞으로 그들이 다른 세계에서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나중에 다시 공통점을 찾게 된다면, 그때는 기꺼이 반갑게 맞이할 것이다. 






카톡 탈퇴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베프와의 절교로부터 1년 뒤, 나는 카톡을 영구 탈퇴했다. '배고파', '심심해'와 같은 무의미한 대화에 싫증이 난 상태였다. 카카오톡 없는 삶은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그 당시에는 꽤 큰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무려 교토까지 가서, 악연을 끊어준다는 야스이콘피라구라는 신사에서 카톡을 탈퇴했다. 마치 은퇴하는 셀러브리티처럼 모두에게 카톡을 탈퇴할 거라고 선언했다. 교수님에게까지 말했으니 아파트에 현수막 거는 것만 빼고 다 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동네방네 소문을 냈는데, 카톡 탈퇴 후 엄청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문자와 전화가 있었고, 무료인 아이메시지와 페이스타임이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에게 무의미한 대화나 가벼운 연락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런 것으로부터 방해받지 않았고, 연락과 모든 대화에 무게감과 밀도가 채워졌다. 


덕분에 나와 진정으로 관계를 이어나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에도 SNS 계정을 하나씩 지워나가고, 주말에는 핸드폰을 꺼두기도 했다. 그럼에도 연락하고 만날 사람들은 결국 만나게 되어있다. 어쩌다 보니 인간관계 미니멀리즘이 디지털 미니멀리즘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삶과 주변 사람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연락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전화를 선뜻 걸긴 좀 그렇고, 문자도 좀 어색한데 카톡 메시지는 가볍게 보낼 수 있는 관계를 신경 쓰지 않는다. 전화하긴 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번호는 처음부터 아예 교환하지 않는다. (업무용 휴대폰은 예외다.) 현지 메신저로 한 달에 한번 정도 이야기하는 친구 3명, 세계 각지에 퍼져있는 지인들을 페이스북 친구로 연결해둔 게 전부다. 쉽게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관계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오늘도 고독의 부재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3년 전이라면 타인에게 고스란히 돌아갔을 에너지와 시간이 이제는 나를 위해 쓰인다. 단단한 마음과 지금까지의 수많은 결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전히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지인들과 만날 때는 더없이 행복하다. 이전보다 더 그들에게 집중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이 소중해졌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나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연인은 나 자신이다. '답정너',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 그 말처럼 누군가에게 고민을 말할 때도 내가 원하는 답이 있다는 걸 깨달은 날이 있다. 이제는 혼자 담담히 글로 써 내려가며 풀어본다. 결국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 자신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덕분에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지 않으며,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도 되지 않는다. 

 

'잘 가'라는 인사를 한 뒤 뒤를 돌았을 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관계나 모임은 없는가? 친구와 고민상담을 하다가 더 고민이 깊어진 적은 없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당신의 마음속 수납장을 정리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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