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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라 Nov 05. 2023

낭만병자

Sentimentalist

나는 병적으로 낭만을 앓았다. 낭만에 취한 나를 사랑했다. 애인을 만날 때마다 매일 새롭게 편지를 써서 나갔으며, 그의 가방에, 주머니에, 책 사이에, 이곳저곳에 편지 숨기기를 좋아했다. 책상에는 언제든 사랑을 담을 수 있도록 편지지가 쌓여있었고, 언제부터인가는 알록달록한 봉투와 아기자기한 스티커도 사모았다. 그는 어떤 편지보다도 언젠가 순간적으로 원고지에 써다가 준 편지를 제일 좋아했다. "제일 자기 같아"라며 활짝 웃은 게 여전히 생생하다. 그는 글재주가 없다면서 내게 준 답장은 손에 꼽지만, 나는 셀 수 없는 편지 숨기기를 이어갔므로 어쩌면 그가 찾지도 못한 편지가 가방 어딘가에 쌓여있을지도 모르겠다. 


헤어진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손톱을 깎곤 했다. 숱한 이별을 겪었으면서도 역시 이별은 적응할 수 없다. 항상 너무 사랑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나는 매 순간 모두를 너무 사랑했으므로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사랑한 나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함께 가꾼 일상과 취향과 언어와 그 모든 것을 잃었으므로, 다시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찾으면서 홀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머리를 자르는 건 정말 청승맞게 '나 이별했어요'하고 소문내는 것 같아서, 잘라낼 수 있으면서도 티가 나지 않는 손톱 잘랐다. 나는 애인의 맨몸에 손톱으로 할퀴고 꼬집어서 상처내서 흔적 남기기를 좋아했으므로 사랑을 할 적에는 항상 손톱이 길었다. 신문지도 깔아놓지 않은 방바닥에 일부러 타칵타칵하고 여기저기 손톱이 튀게끔 잘라놓고, 다시 하나하나 주워 모았다. 그렇게 여기저기 튄 손톱들을 변기에 버리고 물을 내리면서도, 미처 줍지 못한 어느 구석의 손톱을 생쥐가 갉아먹고는 절망에 빠진 나 대신 당분간만 살아주길 꿈꾸기도 했다.


손톱을 다 깎고 나서 갈던 어느 순간에는 책상 위에 뽀얗게 먼지 쌓인 편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글이 새겨지길 기다리고 있었겠지. 나는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썼다가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기를 반복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으므로 손톱은 너무 짧게 잘렸고, 무언갈 쥘 때마다 손끝에 통증이 일었다. 그 손으로 그의 모든 흔적을 치우기 시작했다. 말린 꽃들이 잔뜩 있는 유리병을 발견했다. 언젠가 그가 사준 역 가판대의 만 원짜리 꽃다발이었다. 일일이 꽃을 거꾸로 매달아 정성스레 말리고 모은 나의 애정의 흔적이자 시들어가는 꽃을 허겁지겁 사온 그의 치졸함의 증거였다.


이제는 더 이상 낭만을 뿌릴 곳이 없어서, 낭만을 잃고 시름시름 앓았다. 나는 저번에 버린 유리병 속 꽃다발 마냥 말라가고 있었다.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고 꽃을 선물하지도 않는 많은 밤이 지나갔다. 나는 상처주기를 좋아했다. 길에 핀 꽃을 이유 없이 꺾기도 했고, 길에 핀 풀꽃만 봐도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영영 시들지 않는 조화로 잔뜩 꾸며진 카페테라스를 비웃었다. 어차피 없는 생명주제에, 영원을 열망하는구나. 모래바람을 뒤집어쓴 관리 안 된 조화 정원에서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그냥 있기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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