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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홍 Aug 05. 2024

나의 촌스러운 유럽식당1 <스트라스부르의 황당한 새벽>


무려 90년대 말이었습니다.

친정엄마와의 첫 해외여행, 그것도 유럽으로의 배낭여행이 그 시작이었어요.


돌이켜보니 지금의 내 나이쯤에 엄마는 배낭까지 멘 채 아무것도 모르는 딸과 함께 유럽으로 떠났던 겁니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우리는 xxx로 간다,... 떠나자'류의 책 하나만 달랑 손에  채.


19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1989년 드디어 '해외여행자유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때의 바람을 적극적으로 탄 것은 대학생들이었고, 바야흐로 '배낭여행'의 시대가 열렸죠.


요즘 같으면 왜 내 돈을 주고 가서 개고생을 하고 오나, 이해가 안 되겠지만 정형화된 여행이 아니라는 낭만이 존재했었던 시절입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많은 경험을 할수록 자랑스러워하는 무용담이 쏟아졌던 시절,

체력도 약한 모녀가 겁도 없이 그 바람에  동참하여 해외로 떠났다가 매일 신선한 충격(?)에 시달리게 됐는데요.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곳이 바로  그 이름도 생소한 '스트라스부르'입니다.


독일로 가기 위해 부뤼셀에서 출발한  '유로스타'를 타고 스트라스부르에 내리면 프랑크푸르트행 기차로 탈 수 있었어요.


역시 유럽 스케일은 이게 좋네, 대구, 대전에서 갈아타는 게 아니라 영국에서 탄 기차가 프랑스, 독일에 도착하고 어쩌고 떠들며 흥분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하는 시간이 새벽 3시 45분,

거기서  6시 44분까지 버텨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었죠.

 

무식하니까 용감하다고, 새벽에 어떤 일을 겪을지 전혀 모르는 우리 두 사람은 기차에서 몸을 구긴 채 바게트와 싸간 소고기 고추장으로 허기를 채우며 얼른 내리기만 기다렸습니다.


피곤함에 깜빡 졸다가 기적적으로 눈이 떠진 바람에 어찌어찌 스트라스부르에 내리긴 했습니다.


"여가 대체 어데고?", "몰라, 경유만 하고 지나갈 데 안 알아봤다..."


부산출신 모녀는 불안한 눈으로 난생처음 온 낯선 나라의 낯선 승강장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습니다.


이건 뭐... 프랑스 흑백영화에서나 봤음직한 어두운 길에는 꿈속처럼 불길한 안개만 자욱했죠.

배는 고프고, 졸리고, 춥고, 낯설고 무섭고.. 내 방 이불속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죠.


봄과 여름 사이, 낯선 도시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뼛속으로 파고들 즈음, 황급히 역대합실로 들어갔는대요, 거기엔...

다양한 노숙자와 거지로 추정되는 분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 참고로 전 약한 결벽증이 있어요 - 마약만 한 것처럼 눈 퀭한 거지, 가방 8개를 늘어놓은 뚱뚱한 할머니 거지 등등

한국에선 지나치는 인연이던 그런 분들과 꼼짝없이 한 공간에 갇혀 있어야 했어요!


아니면 찬 거리로 내쫓겨야 하는 상황, 용기 내어 버텨보는데, 운동복입은 거지가 유독 내 앞을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담배까지 피워대면서 말이죠.


소매치기가 많다는 유럽, 험악한 장면을 상상하며 나 만만한 여자 아니거든! 상대에게 눈싸움 레이저를 쏘아대며 내 배낭을 꽉 움켜쥐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엄마는 그때 할머니거지 옆에서 맘 편히 자고 계신 게 아닙니까...!

역시 대한민국 아줌마 깡은 남다르구나, 탄복했습니다.  둘이 마치 오래된 친구사이로 보일 지경이었죠.


편견 때문에 두려워했지만 실은 다들  얌전한  편이었습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새삼 느꼈죠.


스트라스부르, 네이버 출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기 힘든 지경이 되자 결국  우린 낯선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모든 가게에 매정한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좀비처럼 방황하던 우린 셰퍼드급으로  예민해진 후각으로 빵냄새를 캐치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프랑스 국경지역인 이름도 생소한 이 동네에도 새벽 해장국 파는 곳 같은 게가 있었습니다!


클럽에서 놀다 온 걸로 보이는 외국 젊은이들 옆에 얼른 줄을 섰고, 문을 열자마자 따라 들어갔죠.

그 안에 가득 퍼진  구수한 빵냄새, 이 따뜻함이라니... 할렐루야!!


새벽에 출현한 동양인의 등장에 전부 우리를 쳐다봤지만 프랑스식 해장국 세트인 크로와상, 오렌지주스, 블랙커피,  초콜릿 크림빵을 흡입하느라 신경 쓰이지도 않았어요.


그때 뚫어지게 보는 시선이 따가워 쳐다봤더니 아까 만났던 운동복에 담배문 거지형님 아닙니까!

당황해서 꾸벅하고 웃었더니 저도 반갑게 웃습니다.

아, 인류 대통합의 훈훈한 현장... 스트라스부르에 아는 거지분이 생겼네요.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무사히 새벽기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했습니다.


좀비영화 한 편 찍고 온 느낌으로 열차 안을 채우기 시작하는 아침햇살을 바라봤던 것 같아요.

또한 무사함에, 낯선 도시의  인사에 감사하는 마음도 들었죠.


별의별 일을 다 겪었던 배낭여행,

이때만큼 다이내믹한 여행 경험을 못해본 것 같습니다.

고생한 기억이 가장 강렬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남는다죠.


그럼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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