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건드리는 것들
꿈에 나오는 장소나 사람, 물건들은 무슨 이유로 구성되는 건지 궁금하다.
하루 종일 생각했던 것이 나타나면 그렇게 생각해댔으니 꿈에 나올 만도 하지, 싶다. 영 생뚱맞은 것이 나타나면 대체 왜,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인지 이해조차 되지 않는다. 생뚱맞은 꿈임에도 그 속의 요소들이 정교할수록 궁금해진다. 꿈을 꾼 날, 우연히 마주친 무언가가 내 의식과 무의식 중간 어디쯤을 건드려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꿀만한 꿈이든, 영 생뚱맞은 꿈이든 상관없이 꿈은 때때로 얼얼할 정도로 현실을 흔들고 간다.
내 꿈에 나온 강아지는 7월 21일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 아이가 눈조차 뜨지 못하는 새끼일 때 처음 만났다. 이웃집 강아지가 낳은 새끼들 중 한 마리였다. 어두운 개집 안에서 여섯 마리의 새끼들이 낑낑거리며 꼬물꼬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어린 강아지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갓 태어난 생명이라는 사실이 경이롭기도 했고, 작지만 오밀조밀한 생김새가 사랑스럽기도 했고, 너무 작고 약해 보여서 무섭기도 했다. 매일 그 집에 놀러 가 개집 앞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웃 아저씨는 내가 놀러 와 넋을 놓고 한참을 구경을 하고 있으면 '한번 안아볼래?' 하며 새끼 강아지를 품에 안겨주셨다. 초등학생의 두 손바닥 안을 간신히 가득 채우는 작은 생명체 안에 심장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손바닥을 타고 내 몸까지 전달되는 심장소리를 내는 게 이 작은 강아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진짜 네 심장이 내는 소리야? 말도 안 돼. 큰 심장 박동이 이 작은 강아지를 아프게 하는 건 아닐까 걱정됐다. 머리를 깊이 숙여 연분홍빛 작은 코에 내 코를 맞대고 코뽀뽀를 했다. 젖 냄새인지, 새끼 강아지 특유의 냄새인지 모를 비린내가 났다.
강아지를 키우자고 부모님을 졸라댔다. 내가 똥 잘 치울게, 밥도 내가 챙겨 줄게, 진짜 잘 놀아줄게, 나 공부도 열심히 할게 등등등. 종이에 내가 지키겠다는 약속들을 줄줄이 적어 PT도 했다. 매일 학교가 마치기 무섭게 이웃집에 출석 도장을 찍어대며, 그 강아지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내가 얼마나 함께하고 싶은지를 연설한 끝에 부모님에게서 마침내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내가 집 앞에 쭈그려 앉아있으면, 다른 새끼들을 마구잡이로 밟으면서 내게 다가오던 까만 강아지를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젖을 뗄 무렵, 이제는 심장 박동 크기만큼은 자란 그 강아지를 품 안에 꼬옥 안고 왔다. 거실 한편에 작은 개집이 마련됐다. 짧둥한 다리와 꼬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장난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행복했다. 부모님은 침대 위에 오줌을 쌀 수도 있으니 절대 침대 위에 올리지 말라고 했지만, 가족들이 모두 잠들면 몰래 품에 안고 방안에 데려와 침대에 눕고는 내 심장 위에 올려 자장가를 불러줬다. 심장 소리의 속도가 맞춰지고, 작은 숨이 색색거리는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오면 조심스럽게 제 집에 도로 눕혔다.
중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비교적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지만, 내가 고등학교 대학교 연이어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몇 년을 함께 살지 못했다. 내가 휴학을 하고 다시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못해준 것들을 살뜰하게 해 주겠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새로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간식을 들고 있으면 시키지 않았는데도 훈련받았던 앉은 자세로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과는 다르게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반긴다는 것을 알았다. 미용을 하러 갔다가 분리불안이 심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너는 얼마나 외로웠던 걸까. 산책 초반 5분을 신나게 뛰고 나면 헐떡거리다 주저앉을 정도로 체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너는 어느새 늙어있었다. 강아지의 시계는 인간의 시계보다 빠르게 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는 속도를 맞추려 하지 않았을까. 주저앉아 헥헥거리면서도, 산책 나왔다는 것에 신나 열심히 꼬리를 쳤다. 그 옆에 쭈그려 앉아 숨을 고를때까지 기다린 뒤, 그를 품에 안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너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지 말걸 그랬다. 결정할 수 있는 능력도 돈도 시간도, 어느 것 하나도 없는 초등학생 주제에 감히 생명을 키워보겠다 떼를 쓴 것을 후회한다. 강아지의 수명, 10년 이상의 생을 책임진다는 의미의 무게와 따르는 책임을 하나도 모르면서 어떻게 데려오자고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옆에 두고 쓰다듬고 함께 놀고 싶다는 어렸던 내 이기심이 원망스럽다. 그런 것을 깊이 헤아리기에 그때의 내가 어렸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변명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떨어진 시간들, 그 시간 동안 무책임하게 잊고 있었던 것들, 남은 가족들이 잘해주겠지 따위로부터 시작된 죄책감을 갖는 것조차 죄처럼 느껴졌다. 헤아릴 수 없는 크기의 미안함과 죄의식을 아주 조금씩, 티끌씩 갚아가고 있었다.
마지막은 데려올 때처럼 품 안에 꼭 안은 채로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냈다. 길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다 큰 어른이 엉엉 소리 내며 우는 것을 힐끗대며 지나갔다. 창피하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울다 보니 바짝 말라붙은 목에서 꺽꺽대는 소리가 났다. 울 자격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참기엔 비집고 나오는 울음이 너무 컸던 것 같다.
꿈에 나온 강아지는 새끼 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손을 뻗으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듯, 쓰다듬어 달라고 했다. 짧둥한 네 다리와 꼬리를 힘차게 움직이면서. 꿈은 그게 전부였지만, 현실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침대에 누워 손을 폈다 접었다 반복했다. 꿈임에도 손바닥에 느껴졌던 촉감과 온도가 너무 생생했다. 그러고 보니 그 날 산책 나온 다른 사람의 강아지를 잠시 쓰다듬었었다. 신나서는 꼬리를 힘차게 흔들고 있는 강아지였다. 그게 건드린 무의식과 의식 중간 그 어디쯤이 너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