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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섭코 May 22. 2020

<6> 덴마크 조별과제 잔혹사

feat. 수업을 짼 보람이 가득한 발견



 조모임. 조별과제잔혹사를 비롯해 온갖 짤과 패러디 영상들을 양산해내기로 유명한 그것. 덴마크에서 하는 조모임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쓰는 말과 생긴게 다를 뿐 결국 사지달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까. 어딜 가나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 존재하듯, 빌런 질량 보존의 법칙 역시 유효하다. 이 글은 고작 한 학기를 다니면서도 만났던 온갖 종류의 조모임 빌런 이야기다.


 팀원 목록 제출 전날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다른 친구와 조모임 하기로 했다며 난 다른 조 찾아보라고 하며 떠나버린 A : 교환 학생들은 공부 신경 안 쓴다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그가 탈주한 심정이 이해'는' 간다. 그래도, 전날까지 아무 말도 없다가 쏙 사라져 버린 건 너무했다. 같은 기숙사를 쓰는 친구 중에 해당 수업을 듣는 친구가 있어서 무난하게 새로운 조를 만들 수는 있어 다행이었지만, 아니었다면 마감 기한에 늦어 곤란했을 뻔한 일이었다.


과제 마감 몇 시간 전. 내 보고서에 프리 라이딩 할 수 있겠냐고 물어오던 B : 과제를 할 수 있는 시간, 팀으로 하고 싶다면 사전에 논의해서 함께 할 수 있던 기간은  3주 이상이었다. 수업때 딱 한번 마주쳐 단순한 페친이었던 사람이 마감 당일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는 과제 주제가 바뀐 것도 내가 말해주기 전까지 모르고 있었더랬다. 주제와 분량이 조절된 것을 알려주며 혼자 할 수 있을걸? 이라고 이야기하니 사라졌다. 무임승차를 하는 빌런들을 'Free rider' 또는 'Dead weight(죽은 시체를 등에 지고 간다는 바이브의 표현인 듯. 조금 섬뜩하지만, 맞말...)' 라고 부르더라. 이렇게 당당하게 프리라이더를 자처하는 이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B의 메시지. 이벤츄얼리 좋아하네.



 각자 솔루션을 설계해온 뒤, 상호 피드백 후 합쳐 제출하기로 했으면서 미리 업로드한 내 솔루션에 코멘트만 달고 이대로 마무리하자던 C : 공유 폴더에 내 솔루션을 먼저 올린 다음, 너 솔루션 올리면서 내 것에 피드백 달아줘, 라고 이야기했고 이어 답장이 날아왔다. '어, 봤는데~ 내가 해봤자 중복되는 부분 있을 것 같아. 코멘트 달았어~ 저대로 제출하자~' 라고. 수학 문제 푸는 것처럼 답이 하나로 명확히 떨어지는 과제였다면 몰라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이었다. 중복 되는 부분이 당연히 있을 수 있고, 각자의 솔루션을 합치면 결과가 더 풍성해지지 않겠냐, 그러려고 나눈 것이니 (개수작 부리지 말고) 해오라고 말 할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솔직히 그럴 의지도 기력도 없었다.


자기 나라로 귀국해버려서 더 이상 조모임 못한다고 미팅 1시간 전에 말하는 D : 코로나 때문에 귀국을 결정하고 이를 준비하다 보니 조모임이 'Sliped my mind' 였다며 설명한 그는 쿨하게 '난 이 수업 더이상 안해~ 굿바이 가이즈~ 굿럭' 하며 홀연히 사라졌다. 어이는 없었지만 시국이 시국이었던지라 이 역시 나름 이해는 갔었다. 그래, 비행기 타랴 짐 싸랴 오죽 정신 없었겠니. 게다가 그 입장에서는 한번 보고 말 사람들이고, 또 앞으로는 거의 볼 일 없을 사람들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참 배려는 없다 싶었다.


회의 때마다 은근히 영어 가지고 꼽주는 E : 나머지는 조금 짜증 나지만 '어휴, 하고 말지 그냥.' 하고 넘길 수 있었다면 E는 잔잔한 데미지를 꾸준히 보낸 내 기준 역대급 빌런이었다. 영어라는 것이 이 곳에서 내가 가장 힘들어했던 어려움 중 하나이기도 해서 그 데미지가 더 컸달까. 조모임을 할 때마다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너가 뭐라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를 자주 내뱉던 그다. 내 영어가 완벽하지 않다 보니 초반엔 그럴 때마다 위축되곤 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조원들하고는 말도 잘 통하고 진행 효율도 높다는 것을 발견하며 E에게는 말 걸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E 뿐 아니라, 영어가 제1언어가 아닌 이들이 영어를 할 때마다 발음을 지적하거나 묘하게 고까운 태도를 취하는 이들이 아주 간혹 있다. 처음엔 내가 피해의식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세상에는 널 기분 나쁘게 하겠다는 어이없는 악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무시가 답이다.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기는커녕 부족한 부분을 비아냥거리기 바쁜 그들이 애처로운 인간일 뿐이니 상처 받지 말자. 이후에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가면서 실력이 나아지면서는 무시가 조금 더 쉬워지기도 했다.


무척이나 차가웠답니다..


 위와 같은 조모임 빌런들에 이리저리 치이던 중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이런 조별 과제 잔혹사에 유독 너덜너덜해진 기분이 들었다. 유독 그날은 수업에 가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고, 내 취향의 조용한 카페에 가서 달달함과 쌉쌀함의 조화로움에만 빠져있고 싶었다. 그냥 한량처럼 유유자적,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뒤 공부에 지장이 없는 타이밍이기도 했다. 가지 않는다! 빠르게 결정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왔다.

기숙사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주거지역 중간에 위치한 소담한 카페로 향했다. 산책길에 본 적이 있었지만 붐비는 주말에는 내키지 않았고 일찍 닫는 날에는 갈 시간이 나지 않았던 곳이다. 큰 기대 없이 들어간 카페는, 덴마크에서 가본 곳들 중 가장 내 취향이었다.   


완전한 케이크 조각이 있는 사진보다, 부스러기들이 대강 남아있는 사진에 환장하는 경향이 있다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수업을 째는 결심을 할 때부터 이 조합으로 주문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메뉴판에는 늘 그렇듯,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없고 아이스 라떼만 있었다. 조심스럽게, 커피를 얼음컵에 담아주실 수 있냐 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음료죠? 왜..왜죠?' 싶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덴마크 사람들은 대체로 영어가 아주 능숙한 편이지만, 이 카페의 직원 분들은 영어를 못하시는 분들이었다. 소통은 삐그덕거렸지만, 얼음컵과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내어주셨다. 완벽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단번에 찾아 마시는 것도 행복이지만, 번거롭고 낯선 요청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서툰 친절이 더 행복할 때도 있다. 덴마크어를 배워서, 이 곳에 자주 와도 이분들이 난감해하지 않게 주문이나 소통을 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덴마크어를 배우고 싶어 진 순간이었다.

레몬 젤리, 크림치즈, 크럼블 레이어가 쌓인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고, 친절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잔의 바닥을 보고,  중간중간 햇빛이 예쁘게 들이칠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이 카페에 자주 올 것 같다. 한국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카페와 닮았다. 수업을 짼 보람이 가득한 발견이다. 빌런들을 잠시 잊을 수 있어 행복했다.



(*Update : 그리고 이 카페는 코로나 때문에 한 달 이상 문을 닫게 되어버렸다...저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저 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정말이지 수업을 짼 보람이 가득한 발견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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