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프린터 출력 자리에서 내 자리까지는 스물 다섯 걸음 정도.
그 스물 다섯 걸음은 78만원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감히 내 인생 최고의 스물 다섯 걸음이라 할 수 있겠다. 노트북 사이에 가죽필통을 넣은 뒤 화면을 닫은 것이 화근이었다.
싱숭생숭 정신 없는 마음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운 마저도 나를 저버린 것 같은 그런 바람 잘 날 없는 날들이다. 와중에 가지런하게도 깨졌다. 학기 시작한지 2주차에 컴공과의 모니터가 깨져버렸다. 자리에 앉아서 10분간 황량한 마음으로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이대로 한국 갈 때까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어싸인 할 때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강의 들을때 창피한 거 말고는 괜찮을 것 같은데? (와중에 남 시선을 의식하는 나..) 그냥 쓰자... 아니야...이러다 작은 충격으로도 화면 더 나가면 일상생활 마비된다. 고치자. 아니야, 버틸 수 있어. 새로 사는게 낫지 않을까?
동네 방네 액정 나간 사진을 보내며 신세한탄을 한 뒤, 구글링을 시작했다. 덴마크에서 고치기에는 덴마크 물가가 마음에 걸렸다. 몇 주 뒤에 방문할 예정이었던 프랑스에 살고 있는 (코로나 시국 전이었다) 친구에게 조언도 구해봤다. 프랑스에 맡기면 하세월 걸릴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주변의 Mac repair shop 부터 그냥 수리점들을 찾고 후기들도 살폈다. 덴마크 사람들은 외국인 상대로 바가지 씌우려하지 않는 풍요로운 사람들일거야 라는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Repair shop 사이트에 가면 가격표가 픽스되어 업로드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애꿎은 바가지를 쓰지는 않겠구나 행복 회로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거리는 좀 있지만, 후기가 전반적으로 괜찮은 곳에 메일을 바로 넣었다.
MacBook Pro 13인치, 17년도 모델의 스크린 교체 가격은 5,000DKK. 한화 87만 5천원이다.
이게 덴마크지. 이게 북유럽이지. 빵 쪼가리나 파스타를 해서 먹을 때마다 '이렇게 살면 물가 뭐 괜찮지' 하던 나에게 교훈을 주는 사건이었다. 그 와중에 학생이라는 상황을 설명했더니 10% 할인을 제안 받을 수 있었다. 할인을 고려해도 교체 가격은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다시 고뇌에 빠졌다.
한국에서도 모니터 교체에 60만원은 든다는 이야기, 배터리 사이클 확인해보고 별로만 이참에 바꾸라는 이야기, 17년도형이면 쓸만하다는 이야기, 노트북을 써야하는 상황이니 고치는게 답이지 않냐는 이야기 등 친구들이 의견을 보태줬다.
나는 노트북 바꿀 생각이 없다 -> 한국 가도 새로 안산다.
이 노트북으로는 학습 및 삶의 질이 하락한다 -> 고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2년 넘게 썼으면, 모니터 정도 갈아줘도 괜찮다 -> 합리화.
한국에서도 맥북 모니터 교체는 비싸다 -> 거기서 고치나 여기서 고치나다.
결론 : 고치자
이왕 해치워야 하는 일, 빠르게 해치워버리자는 마음 (그리고 모니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에 메일을 주고받은 곳에 내일 방문해보겠다고 보내곤 도서관을 떠났다. 그 다음날, 기숙사에서 훨씬 가까운 Repair Shop 을 한 곳 더 찾아갔다. 나름 가격 비교 정도의 노력은 한 후에 돈을 쓰고자 했던 마지막 발악이었다. 중국이 (당시에는 중국에서만 코로나가 심각했었고, 유럽은 관심조차 없는 분위기였다) 코로나 사태로 공장 등이 느리게 굴러가 부품이 3주는 걸려야 온다고 하며, 5,000DKK 을 부르셨다. 3주라니, 한국인은 기다리지 못한다. 혹여 확인한 가격이 크게 달랐다면 마음이 쪼그라들며 결론을 바꿨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비슷한 시세도 확인했고, 4,500DKK가 최선이다라는 생각에 위 메일을 주고받았던 수리점에 바로 방문하곤 노트북을 맡겼다. 학생 DIscount 로 지출 대비 푼돈일지라도 아낀 나를 칭찬하며 카드를 긁었다.
지금은 말끔한 모니터로 글을 쓰고 있다. 후련하다. 아주 좋다. 2년동안 고생한 부품 리뉴얼 해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한국에서도 바꾸고 싶어서 바꿨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이 기회로 내 노트북을 좀 더 애지중지, 소중하게 다루는 정신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앞으로 가방도 쾅쾅 내려놓지 않을게, 코딩하다 화가 난다고 모니터를 세게 닫지도 않을게. 나랑 오래가자.
하루 동안은 저 지출의 여운이 남아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외국에서 예상치 못한 일로 큰 돈을 쓰게 될지라도 너무 스스로를 탓하지 않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이로운 것 같다. 나처럼 스스로의 부주의함이 초래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핸드폰 도난이나 분실처럼 어쩔 수 없는 일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내가 가죽 필통을 껴두지 않았더라면..." 같은 시뮬레이션들로 내 마음을 찢어발기지 말자. 아픈건 나뿐이다. 이미 벌어진 일 뭐 어쩌겠나. 차분하게 최선의 선택지를 찾고, 문제를 해결했으면 스스로를 칭찬이나 해주자. 너 외국에서 노트북도 수리해봤어? 이 자식...상황대처가 쩌는걸? 인생 경험치 늘었는걸? 이렇게.'
*2월 15일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