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번 김장은 내가 한다니까.
배추 속 상했으면 얼른 바꿔야 하는데 너 일어나는 걸 언제까지 기다리니.
어무니가 배추를 다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전날 분명히 내가 김장을 한다고 했는데 어무니가 먼저 시작해버렸다. 이불이 무거운 건지 몸이 무거운 건지 이불속을 빠져나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어무니도 일 다녀오셔서 피곤할 텐데. 이놈에 몸이 잠을 더 원한다.
엄마 그러면 나 10분만 더 자고 일어나서 나머지는 내가 다 할게.
쩌억, 배추를 가르는 소리와 툭툭 소금과 배추가 부딪히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한다.
이불속과 노래방은 염치를 없게 만드는 공간이다. 이불속에 있는 이는 잠에 취해, 노래방에 있는 이는 흥에 취해 추가시간을 달라고 외친다. 굳이 차이점을 찾자면 이불속에 있는 이가 조금 더 웅얼거리며 말한다는 점? 나는 두 번 정도 염치없는 사람이 된 후에 이불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무니 곁을 가니 배추가 소금에 절여져 있었다. 수분이 쭉쭉 빠져 축 늘어져 있는 배추의 모습을 보니 방금 전에 내 모습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까 밖에 다녀 오셔요. 어무니.
배추는 3시간 뒤에 잘 절여졌는지 확인하고 채반에 넣고 3번은 닦아줘야 해. 절여질 동안 무 채칼 밀고 양파 썰고, 냉동실에 대파 있으니까...
뭐가 그렇게 불안하신지 김치 만드는 방법을 계속 설명을 해주시는 어무니에게 '엄마 나 고등학교 때부터 요리했잖아'라고 으스대면서 믿고 맡기라고 말한다. 그렇게 김장 1회 차 이 모씨가 김장 30회 차 어무니에게 큰소리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된 후에 어무니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시작하셨다.
그럼 믿고 나간다. 아들이 맛있게 잘해놓겠지.
띠리링 철컥. 도어록의 단조로운 멜로디와 문 닫히는 소리가 신호탄이 되었고 나의 첫 김장이 시작됐다. 갓, 무, 양파를 다듬어 썰고 채를 민다. 재료를 다듬고 썰고 시계를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손질한 재료를 대야에 모으고 배추가 잘 절여졌는지 배추를 조금 먹어본다. 1시간만 더 절이면 되겠는데?
김장은 잠시 접어두고 이불 속에 들어가 핸드폰을 켠다. 본업은 MD, 부업은 인터넷 망령이기 때문에 남는 시간은 인스타그램, 유튜브로 허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인터넷 망령이 되면 뇌가 텅 비워지고 시간이 훅훅 사라진다. 1시간이 녹았다. 오늘 한번 더 염치 없어질 수는 없기에 10분 더를 외치지 않고 바로 일어난다.
절여진 배추를 씻고 물기를 털고 옮기기를 몇 번 반복한다. 이제 양념을 하고 버무리기만 하면 끝이다. 김장 1회 차가 이렇게 순조롭게 해내다니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생각하며 양념 재료들을 살피는데 뭔가 하나 없다. 아이고... 풀을 쑤는 걸 깜빡했다. 하필이면 식힐 시간이 필요한 풀을 미리 안 쒀놓았다니.
부랴부랴 멸치로 육수를 낸다. 멸치 육수를 체에 거르고 밀가루를 넣고 휘휘 저어 풀을 쑨다. 풀을 쑨 냄비를 밖에 놓고 빨리 식어라 주문을 왼다. 풀이 식는 동안 어무니가 김치 속을 만들 때 쓰는 양념들을 상기시켜본다. 역시나 기억력은 날 배신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초록창과 백종원의 콜라보다. 초록창에 백종원 김장양념을 검색해보니 대충 어떻게 양념을 만들지 감이 온다.
다행히도 날이 추워서 풀이 금방 식었다. 고춧가루, 다진 마늘, 설탕, 멸치액젓, 풀을 넣고 무채를 비롯한 속재료를 넣고 휘적휘적 섞어준다. 고춧가루를 푸짐하게 넣어 빨간 빛깔이 꽤나 맘에 든다. 맛을 보니 제법 맛있는 것 같아 배추에 버무리기 시작한다. 배추를 빨갛게 물들이고 난 후 한 입을 딱 먹어보니 웬걸 어무니가 한 김치 맛이랑 똑같다. 이게 손맛인 건가? 같은 재료를 쓴 거긴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맛이 날 수 있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치를 통에 담는다.
그렇게 나의 김장이 완벽하게 끝났고 뿌듯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올 때쯤 어무니가 돌아오셨고 김치를 먹어 보시더니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셨다.
어무니 아들내미가 요리할 줄 알아서 좋죠?
그러게. 아들이 최고네. 그런데 대파는 넣었어?
띠용... 냉동실에 대파 있다고 했었지. 어쩐지 너무 순조롭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