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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Oct 30. 2019

리투아니아에서 만난 이스라엘 민간교류

2018년 5월 21일

리투아니아 곳곳에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곳이 많다. 정확히는 유대인 공동체에 관련된 곳들로, 대부분 추모와 기념을 하는 곳이다.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한국인에게는 먼 나라에서 자행된 역사 속의 끔찍한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유럽, 특히 동유럽에서는 잊고 싶어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아직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다. 2차 대전 전까지 있었던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 흔적과 생존자들, 오랜 역사를 가진 반유대주의의 미묘함, 홀로코스트 때 벌어진 공식 또는 비공식의 다양한 사정들이 얽혀 기억과 상처가 선명하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리투아니아와 국가 대 국가로 이 부분을 논의하지는 않는다. 개인이나 그룹 차원에서 유대인들은 고향에 대한 기억과 유대감을 복원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한국인이 일제시대나 냉전의 상처를 기억하는 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배경과 맥락도 다르고 접근 방식도 많이 다르다. 어찌 보면 이스라엘의 민간 공공외교 역량이기도 하고, 유대인 공동체와 동유럽 약소국 사회의 특성이 드러나는 영역이기도 하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동체가 컸던 것처럼 리투아니아에도 리트박(Litvak)이라고 불리는 리투아니아 유대인 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2차 대전 때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있기 전까지 유대인 공동체는 리투아니아 사회의 큰 부분이었다. 지금 남은 모든 장소들은 홀로코스트로 귀결되어 추모와 기억, 미래를 향한 희망을 호소하는 기념관들이다. 카우나스의 9호 요새, 스기하라 일본 영사 기념관도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념의 한 부분이다. 스기하라 기념사업에는 일본과 함께 이스라엘의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공동체도 큰 후원을 하고 있다. 빌뉴스에는 시내에 유대인 공동체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게토가 있던 골목들은 구시가의 중심이라 빌뉴스에 갈 때마다 지나다니게 된다. 하루 날을 잡아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유대인 기념관(홀로코스트 기념관), 유대인 박물관(미술관), 유대인 회당까지 둘러보았다. 


빌뉴스 건물 벽에 붙어 있는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게토 안내문, 재건된 지금의 유대인 회당

리투아니아 유대인은 2차 대전 직전에 16만 명 정도로 인구의 7% 정도 되었다. 대부분 빌뉴스나 카우나스 같은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나치가 동쪽으로 확장하면서 서유럽과 폴란드의 유대인들이 피난 왔고 나치에 점령당할 때는 25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만 명 넘게 학살당했다. 기념관마다 비슷한 이야기로 시작하기 때문에 몇 군데 다니다 보니 어느 정도 외우게 되었다. 일제시대를 기억하는 한국인으로서 자동으로 압제와 학살의 고통에 공감을 표시하며 유대인 기념관을 먼저 찾아갔다. 큰 길가에서 살짝 안쪽에 자리한, 부유했던 한 유대인 가족의 주택을 개조한 다소 낡은 건물이다. 마당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스기하라 일본 영사에 대한 감사를 새긴 기념돌(표지석)이다. 리투아니아에서 홀로코스트를 기리는 모든 곳에는 스기하라 영사 이야기가 나오고 일본과 협력해서 설치한 기념물이 있다. 일본의 공공외교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훌륭한 일이었지만 한국인으로서는 감정이 미묘해지는 부분이다. 


큰길에서 잘 보이지 않는 낡은 주택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념관, 스기하라 영사에 대한 감사 기념돌이 시사하는 또 다른 부분은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리투아니아 사회의 이중적인 상황과 감정이다. 나치는 유대인들만을 집중적으로 학살했고, 여기에 대해 대부분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방관자였고, 당연히 상당수 나치 동조자도 있었다. 수천 명을 구한 스기하라 일본 영사처럼은 아니더라도, 작게라도 유대인을 도와준 리투아니아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소수였다. 점령당한 입장에서 도와주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가 된 것도 분명한 일이다. 모든 기념관과 기념물이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리투아니아 사회에 반성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한쪽에 반드시 이 문제를 언급하고 질문을 던져놓는다. 관계는 소중하지만 결코 잊은 듯이 덮지는 않는 거다.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념관 내부전시와 건물 외부, 마당의 스기하라 영사 기념표지석

9호 요새도 그랬고 소련 치하의 KGB 학살 기념관도 그랬듯이 여기도 깨알 같은 글씨와 많은 사진, 화면, 유물들로 설명이 끝이 없었다. 리투아니아어, 영어, 이스라엘 이디쉬까지 완벽하게 병기하고 있다. 설명이 너무 긴 나머지 지쳐서 다 읽지 못했다. 나치 점령 이전에 리투아니아에 살던 유대인 공동체 소개, 나치 때문에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유대인 이야기로 시작했다. 제일 주된 내용은 나치 점령 하에서 빌뉴스로 이송되었거나 이미 와있던 유대인들이 게토로 몰아넣어진 후 그 속의 생활과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절망적이었지만 복싱 대회도 개최하며 희망을 찾던 이야기, 지하로 길게 굴을 파서 탈출과 무장봉기를 시도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물론 모두 학살로 귀결된 슬픈 이야기가 되었다. 


유대인 박물관(미술관)도 이 시기에 대한 설명은 같은 톤을 유지한다. 박물관은 현재 작게나마 복원되고 있는 빌뉴스 유대인 공동체의 사무실과 회합 장소로 쓰이는 건물이다. 상설 전시도 조금 있고, 기억을 위한 기획전을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찾아갔을 때는 마침 사무엘 박(Samuel BAK)이라는 유대인 화가의 작품 전시가 있었다. 9살 소년이었던 1942~43년 기간을 빌뉴스의 게토에서 보낸 분이었다. 당시에 9세 어린이가 노트에 그린 스케치 그림으로 게토 내에서 전시회도 했었다고 한다. 그 노트 그림도 일부 전시되어 있었는데, 9세 어린이 그림 치고는 솜씨가 놀라웠지만 너무 절망적인 어른들의 표정이 그려져 있어서 충격적이었다. 살아남은 소년이 화가가 되어 그린 작품 중 그 어린 시절의 인상이 강하게 나타난 작품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었다. 

사무엘 박(BAK) 화백이 어린 소년 때 빌뉴스 게토에서 스케치했다는 노트와 그의 작품들

개인 차원의 문화 교류를 통해 기억을 되새기고 나누는 일은 매우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카우나스에서 만난 벨라 시린(Bella Shirin)이라는 여사님은 카우나스 출신 유대인으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이스라엘에서 살다가 돌아온 분이었다. 영어를 잘 못하셔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음악가이셨고 시를 쓰시는 분인데, 매년 스기하라 기념주간이나 아시안 위크 때 화면을 곁들인 시 낭송을 하시거나 크고 작은 강연을 하셨다. 화가는 그림으로, 시인은 시로, 다양한 행사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단체도 활발하다.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서 살던 그분들에게 이곳은 고향이다. 악몽 같은 기억이 있어도 돌아오고 회복하고 싶은 곳이었다. 개인 차원에서 유대를 지속하고, 조금씩 회복되는 유대인 공동체를 지원하며, 리투아니아 사람들 중에서 친구를 늘려 가고 있다. 


이런 교류 활동들을 보면서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기억하고 접근하는 방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유럽 거의 모든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나라에 따라 접근방식이 다를 것이고 리투아니아는 그중 한 사례다. 리투아니아와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라는 과거사를 대할 때는 국가는 거의 배제되고 사회(개인과 단체)가 주도한다. 국가 간 관계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는 이슈가 아니다. 일치된 의견의 표명을 요구하지 않고 천천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설득하려는 노력이 아주 간접적이다. 당연하게도 리투아니아 국가와 사회는 책임성이 있는 가해자 논리는 전혀 취하지 않는다. 폴란드보다도 어쩌면 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약자였고 러시아(소련)와 나치로부터 압박과 피해를 당했기 때문이다. 유대인 공동체는 관망자나 동조자였던 다수를 잊지 않지만, 극소수나마 있었던 미담을 언급하면서 공감을 넓혀 나간다. 물론 한일관계와는 상황과 맥락이 다르다. 그래도 국가 간 자존심을 건 갈등 구조를 지속하는 것보다, 느린 호흡의 민간 교류로 측면을 넓혀 공감을 늘려 가는 것이 하나의 장기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스기하라 기념주간 개회식에서 시 낭송을 하시는 벨라 시린(Bella Shi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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