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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y 04. 2018

두 번째 독립기념일과 러시아 문제

2018년 3월 11일

3월 11일은 2월 16일에 이어 한 달도 안 되어 찾아오는 두 번째 독립기념일이다. 1990년 3월 11일, 반소, 반공 정치인들이 주도한 리투아니아의 새 의회가 독립의 회복(Restoration of Independence)을 선언하고 리투아니아 국가 재건(Re-establishment of Statehood)을 선포하였다. 이미 1988년부터 소련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거세던 상황에서 고르바초프가 직접 방문하기도 했지만 독립 요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실질적인 독립은 1991년 1월 말에 이루어졌다. 그 전에 리투아니아의 이탈을 막으려는 소련 군대의 무력 진압이 있었다. 1991년 1월 13일 빌뉴스 TV타워에서의 민간인 희생은 지금도 독립투쟁의 마지막 장면으로 추모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로써 리투아니아는 소련에서 가장 먼저 독립하여 소련 붕괴의 테이프를 끊은 국가가 되었다. 이 마지막 투쟁과 독립국가 수립의 선봉에 선 리투아니아 정치인이 Vytautas Landsbergis 옹이다. 처음 리투아니아에 와서 맞는 9월 개강(입학) 행사 때 축사를 하러 오셨었는데, 그때 멋모르고 인사하고 같이 사진도 찍었다. 아직도 독립투쟁 지도자들이 살아있는 생생한 기억이다. 

자유로에서 행진 행사도 있었다. 날씨가 좋지는 않았지만 국기나 다른 깃발들을 들고 많이 참여했다.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가 되었지만 리투아니아는 지금도 러시아의 위협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운다. 소련 이전에도 이미 18세기부터 러시아 차르의 지배를 받았고, 소련까지 이어진 억압과 폭력의 역사가 워낙 길었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벨라루스 너머 러시아 본토에서 야심을 숨기지 않는 푸틴 대통령의 존재는 그 자체로 안보 위협이다. 발트 국가 내 러시아계 인구가 좀처럼 섞이지 않는 경향도 항상 걱정거리다. 리투아니아는 서쪽 발트해 연안의 옛 프러시아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 영토 칼리닌그라드(옛 쾨니히스베르크)를 접하고 있어 양쪽으로 러시아와 면한 상황이다. 폴란드로 통하는 그 사이의 회랑은 별로 넓지가 않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차지한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칼리닌그라드와 발트 지역 내 러시아 인구를 핑계로 밀고 들어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항상 존재한다.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는 정치적인 위력이 실감나는 행위자가 아니지만, 유럽 특히 발트 지역에서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 

1972년 5월 15일에 이 자리에서 분신자살한 로마스 칼란타의 추모조형물에는 자주 꽃이 놓여 있다. 5월에는 더 많이 놓인다.

지금도 러시아가 위협이라는 점에 모두 공감하고는 있지만 어쨌거나 공휴일은 즐겁다. 카우나스는 이 휴일을 즈음하여 봄맞이 장터 축제를 크게 연다. 3월 초 빌뉴스의 성 카시미르 축제 장터와 일주일 정도 차이가 나고 봄맞이로서의 의미도 딱 알맞다. 자유로에서는 독립 회복을 기념하는 행진도 있었다. 자유로 중앙 광장에 있는 로마스 칼란타의 추모 조형물이 오늘따라 더 눈에 띈다. 1972년에 그 자리에서 반소 투쟁을 외치며 분신자살했던 18세 청년은 1970~80년대 반소 독립 투쟁의 기폭제와 상징이 되었다. 구시가 광장에서도 무대를 설치하고 축하 콘서트가 있었다. 아무래도 100주년을 맞는 2월 16일의 첫 공화국 독립의 숫자적인 의미가 너무 커서, 100주년의 첫 번째 독립과 1990년의 두 번째 독립을 함께 축하했다. 역시 국경일이라 모든 박물관이 무료였으므로 구 시청사 박물관이나 카우나스 성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구시가 광장의 대성당에도 국기가 걸리고, 광장의 콘서트 주변에도 국기의 노랑, 초록, 빨강 3색이 넘쳐난다.

장터는 네무나스 강변의 섬 공원에서 사흘간 계속되었다. 눈이 녹기 시작해서 질척하고 물웅덩이도 곳곳에 있었지만 조금 풀린 날씨 덕에 사람이 많이 몰려 제법 장터 분위기가 났다. 역시 주요 품목으로 부활절 준비용 말린 꽃 장식이 눈에 띈다. 카우나스의 장터는 빌뉴스보다 훨씬 생활 밀착형이고 먹거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빌뉴스보다 조금 더 저렴하다. 작은 목공예 기념품을 쇼핑하던 나도 결국 조지아식 빵과 각종 딸기 등 식료품을 집어 들었다. 빵, 과자, 디저트, 치즈, 정육(햄과 소시지), 훈제 생선, 말린 과일, 커피와 차, 잼과 버터 종류, 꿀, 맥주, 전통주까지 장보기에 제격이다. 구이와 볶음 요리로 무장한 간이식당의 맛있는 냄새도 대단하고, 사이사이에 디자인이 특이한 수공예품도 눈을 즐겁게 했다. 무대에는 민요나 만담을 공연하는 팀들이 연달아 올랐다. 

이 글을 쓴 시점은 시일이 좀 지난 뒤이다. 이날 이후 3월 19일에 러시아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모두가 확신했듯이 푸틴 대통령이 재선 되었다. 사실상 연임 승인이나 다름없었다. 개표 중간 즈음부터 76퍼센트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로 푸틴이 당선되었다는 뉴스가 발트 지역 신문을 장식했다. 브라우저에 링크를 걸어놓은 신문 중 하나인 발틱 타임스(Baltic Times)에서도 톱기사로 다루었다. 그 아래에 관련 기사가 연이어 눈에 띄었다. 일관되게 러시아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 유럽에 보다 확실히 편입되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는 기사들이다. 


- "Baltic, Polish PMs to discuss desynchronization with Juncker" 발트 국가 총리들, 유럽연합 융커 집행위원장을 만나 러시아로부터 전력망을 분리하고 서유럽과 전적으로 연결하는 문제 논의

- "Baltic, Polish ministers sign joint declaration on EU Common Agricultural Policy" 발트 국가와 폴란드 장관들, 농업 관련 협상에서 유럽연합의 공동 농업정책과 입장을 같이 한다는 공동성명 조인

- "EU recommended to create coalition against fake news" 유럽연합, 가짜 뉴스에 대한 공동전선 형성 제안 

- "StrategEast launches new index measuring Western transition in post-Soviet states" 모 싱크탱크, 구소련 국가들의 서구화 이행 정도를 측정하는 새 지표 구축 

독립 기념일 장터 중앙에서는 민속음악 공연도 이어진다.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감정의 골은 깊다. 푸틴의 독재체제 구축이 명확해지면서 직접적 안보위협 인식도 강화되고 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징병제가 부활했다. 그 때문에 갑자기 군대에 가게 된 젊은 층도 별 반대가 없다. 물론 복무기간이 9개월로 짧고 자원자를 우선으로 하면서 부족 인원을 채우는 징병제이다. 요즘은 특히 러시아발 가짜 뉴스가 심각한 이슈 중 하나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직접 읽은 적은 없지만, 동료 교수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발틱 국가 내 러시아계 인구가 차별을 받고 있다든지, 발트 국가들이 파시즘 성향을 보인다는 내용이 많다고 한다. 리투아니아도 러시아계 인구가 있고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훨씬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심상히 넘길 일은 아니다. 크림반도 병합 때에도 비슷한 사전 포석이 있었다는 우려가 겹쳐 있다. 유럽의 일원이 되는 '서구화'에 있어서 발트 국가들은 분명 모범생이다. 북한 용어로 속도전 수준이다. 폴란드나 체코도 안 쓰는 유로화도 쓰고, 산업과 무역 정책도 유럽연합의 기준을 따라간다. 에너지망도 분명 러시아산이 저렴하겠으나 굳이 끊고 서유럽하고만 연결하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 30년이 채 안된 최근의 독립은 완전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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