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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Nov 10. 2019

그루토 조각공원, 보존 처리된 레닌과 스탈린 동상들

2018년 8월 5일

갑자기 한국 귀국이 결정되면서 리투아니아에서의 모든 걸 급히 정리해야 하게 되었다. 거의 2년을 꽉 채우며 나름대로 부지런히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더 머물 것으로 생각하고 미루어둔 곳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곳들이 많았는데, 그중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이 그루토 공원(Gruto Parkas)이다. 소련에서 해방되고 나서 전국에 있던 사회주의 영웅들의 동상들이 파괴되고 쓰러졌는데, 그 와중에 그것들을 수집해서 전시해 놓은 소비에트 조각공원(박물관)이다.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 지도의 거의 정 중앙에 있고, 거기서 남쪽으로 시선을 내리다 보면 드루스키닌카이(Druskininkai)라는 온천 휴양도시가 있다. 거의 벨라루스 국경에 가까운 도시인데, 그루토 공원은 이 도시 근교에 있다. 사실 드루스키닌카이 도시 자체도 한 번쯤 꼭 가보라는 추천을 많이 들었다.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온천 휴양지로 개발이 되었다고 하는데, 소련 시기에는 연방 차원에서 인민을 위한 대규모 휴양지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핀란드의 사우나가 유명하지만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지역도 특유의 사우나 문화가 있다. 드루스키닌카이는 계속 현대적으로 개발을 해서 온천 워터파크가 상당히 잘 되어 있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에 어느 정도 체류하는 사람이라면 드루스키닌카이의 워터파크나 스파 리조트를 가보게 마련이다. 사우나를 가끔 즐기지만 팬까지는 아니고, 혼자 다니면서 굳이 워터파크에 갈 생각까진 들지 않아서 드루스키닌카이는 그만두었다. 숲과 호수도 아름답다고 들었기에 좀 아쉽기는 했지만, 꼭 보고 싶던 조각공원에 집중하기로 하고 렌터카를 곧장 그루타스 마을로 몰았다. 

그루토 공원 입구와 곳곳에 나타나는 레닌, 스탈린 조각상들, 그리고 소련 추억팔이 식당 메뉴판

"그루토 공원(Gruto Parkas): 소비에트 조각상 박물관"은 그루타스 마을 공원이지만 도심에서 멀어서 차가 없으면 접근이 쉽지 않다. 주차장에서 걸어 들어가면 숲 속의 산책로를 따라 소련 영웅 동상들이 연달아 나타나고, 작은 것들은 캐빈하우스 같은 곳에 모아 놓기도 했다. 소련 치하에서 나라 곳곳 제일 좋은 자리에 세워져 있던 레닌, 스탈린, 리투아니아인 볼셰비키 영웅 조각상들을 주워다 모아 놓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간간이 있다. 소련 지배에 대한 저항과 반발심이 극심했기에 이 조각상들을 보존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보란 듯이 크게 서있던 것부터 무너지고 방치되었다. 그냥 두었으면 돌보는 사람 없이 사라질 것들이었다. 헝가리에도 비슷한 공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소련 지배 경험이 있는 나라라고 해서 다 이렇게 모아서 보존한 것은 아니다. 발트에서 이런 조각상들을 사라지기 전에 수집해서 보존한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일종의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분위기는 그리 어둡지 않다. 세대와 경험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일부에게는 소련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곳일 것이다. 공원이므로 중간에 안내소와 레스토랑도 있는데, 레스토랑 이름이 '노스탤지어(Nostalgija)'였다. 소련 군인들이 먹던 철제 도시락(소시지와 감자) 메뉴도 있고, 러시아 식이라며 각설탕을 곁들인 차를 내준다. 종업원들도 소련식 복장을 하고 있다. 그 시대에 대한 향수라고 해야 할지 조롱 섞인 희화화라고 해야 할지 좀 헷갈린다. 한국에도 50~60년대 풍의 드라마 세트장 같은 추억팔이 관광지가 꽤 있는데, 그런 분위기도 조금 섞여 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조각 공원이다. 산책로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조각상이 나온다. 소련 시기에 탁 트인 장소에 서있던 사진, 해방 직후에 무너지던 사진을 곁들인 설명판이 있는 조각 박물관이다. 모든 설명은 리투아니아어, 영어, 러시아어로 병기되어 있었다. 

그루토 공원을 소개한 영자신문 기사, 조각상마다 곁들여져 있는 사진자료들. 아래 레닌 동상은 발트에서 제일 큰 것이었다고 한다. 혁명 독려 군상들이 꽤 인상적이다.

공원 초입에 마치 냉전 시기 광장의 신문 게시판처럼 안내문과 기사 스크랩을 쭉 붙여 놓았다. 공원 개관 때 상당히 화제가 되었는지 영어로 된 해외 신문 기사도 많았다. 일반에 공원으로 공개된 것은 2005년이라고 한다. 한 영자신문이 "Soviet Ghost Park"라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1990년대 초 리투아니아 해방 직후에 모두 파괴되어 도처에 굴러다니던 소련 조각상들은 사실 처치 곤란이었다. 이곳 그루타스 마을 주민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정부의 허가를 얻어서 90년대 동안 전국에서 이런 조각상들을 수거했다.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고, 자비로 해서 자기 땅에 공원을 만든 것이다. 극혐의 대상이 되어 사라질 운명이던 조각상들을 모아서 보존하고 공원으로 만든 리투아니아인들의 아량이 존경스럽다는 게 그 영자신문 기사의 내용이었다. 


레닌과 스탈린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소련 치하에서 영웅으로 추앙된 리투아니아 인들(당시 공산당 고위직이었거나 혁명 중에 죽은 젊은이) 조각상도 많다.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인물들이라 이름도 스토리도 너무 생소했다. '어머니 러시아'나 '무명용사'처럼 신화풍의 조각상도 상당수 있고 혁명이나 동원 캠페인을 독려하는 집단 군상도 몇 개 있다. 캐빈하우스 같은 목조 건물로 실내 전시실이 있는데, 관공서 벽에 붙어있었음직한 크고 작은 레닌 얼굴 부조가 엄청나게 모여있었다. 동원 캠페인 포스터와 서적도 꽤 많이 수집한 자료실이다. 역시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해서 지도와 사진으로 리투아니아 인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고 시베리아 곳곳에서 유형을 살았는지 설명한다. 소련 때 연방국가 정부 간에 주고받은 다양한 선물이나 기념품도 전시되어 있다. 혹시나 자세히 살펴보다가 용케 북한에서 보낸 '조선의 여인' 흉상을 하나 찾아냈다. 당차게 머리를 빗어 넘겨 묶고 양장을 한 여성 혁명전사 이미지였다. 같은 소비에트 블록이었다 해도 먼 동방의 별종이었던 북한은 리투아니아에서 별로 존재감이 없었을 텐데, 그래도 기념품이나 축전 정도는 주고받은 모양이다.  

실내 전시실에 즐비했던 두상과 흉상, 그리고 북한에서 보낸 '조선의 여인' 기념품

비가 오고 우울했다면 그로테스크한 소련의 흔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는데, 다행히 8월 초의 맑은 하늘이었다. 한적한 공원 구석에서 혼자 마주치는 거대한 레닌이나 비장한 스탈린, 목만 남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나름대로 발랄해 보였다. 공원은 꽤 넓어서 웬만한 레닌과 스탈린 조각상에 다 발도장을 찍으려면 상당히 운동이 되었다.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 그리고 북한에 엄청 많은 조각상들 생각이 날 수밖에 없다. 일제시대의 신사가 해방 후에 싹 사라졌고, 한국에서는 지금도 과거 인물들의 동상에 대한 논쟁이 종종 일어난다. 특정 인물이나 이념의 상징은 세상이 바뀌면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 어떤 과정을 거치든 북한에서 정권이 바뀌고 지배 세력이나 이념이 전혀 달라진다면, 곳곳에 많을 그 조각상들도 자리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 모아서 이런 공원을 만들어 과거 학습 겸 추억팔이 관광용으로 공개하는 상황이 가능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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