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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y 10. 2018

카우나스 영화관에서 구경한 북한과 리투아니아

2018년 4월 6일

리투아니아에도 미국식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곳곳에 있다. 카우나스도 내가 가본 곳만 두 군데나 있었다. 자유로에는 단관짜리 오래된 영화관도 있지만 특별한 상영회 때만 쓰고, 흥행성 있는 상업영화는 전부 멀티플렉스에 걸린다. 가격이 6유로 정도로 8천 원쯤 되고 시설도 한국과 큰 차이는 없다. 리투아니아의 자체 영화산업은 아직 미미하고 대부분 미국 영화가 차지한다. 종종 작은 영화제도 하고 유럽과 아시아 영화도 걸린다. 한국영화 '아가씨'가 이틀 정도 상영된 적도 있다. 당연하게도 리투아니아어로 자막을 깔기 때문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화는 영어로 들을 수 있는 영미권 영화다. 미녀와 야수, 캐리비언의 해적, 원더우먼 같이 영어 대사에 큰 부담 없는 미국 영화를 보러 가면 그저 편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영화는 따로 있다. 아직도 냉전 구도에 갇혀있는 북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리투아니아에서 본 경험과, 리투아니아 독립 기념으로 만들었다는 리투아니아의 숲 이미지에 대한 영화다.  

아크로폴리스 몰에 있는 포룸 시네마(Forum Cinemas)

카우나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Forum Cinemas'를 처음 가본 게 2017년 4월이었다. 동아시아 학부의 동료 리나스 교수가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는 날이라고 알려주었다. 어떤 다큐인지도 모른 채 여기서 웬 북한 다큐 영화인가 싶어 부랴부랴 가보았다. 아시아센터 교수진들과 관심 있는 한국 교환학생도 같이 보러 갔는데 생각보다 관객이 많아서 놀라웠다. 해외 감독들이 찍은 북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한국에서도 종종 개봉을 하지만 홍보도 부족하고 관객이 별로 없다. 북한이라는 생소한 먼 나라에 호기심이 이렇게 강한가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그 영화에 등장하는 록그룹이 리투아니아에서 꽤 알려져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카우나스의 록음악 축제에 온 적 있다는 그 록그룹 '라이바흐(Laibach)'가 평양에서 공연하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Liberation Day' 포스터

록음악은 전혀 모르다 보니 무려 '슬로베니아'의,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인더스트리얼 밴드'라는 이 그룹이 북한보다 훨씬 생소했다. 사전 지식 없이 맞닥뜨린 그들의 음악이 당황스러워서 북한 사람들의 딱딱한 표정에 공감이 갈 정도였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라이바흐는 슬로베니아가 유고 연방이던 1980년에 만들어진, 문제적 스타일로 유명한 그룹이었다. 노래와 공연이 마치 군대에서 제사 지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도발적인 파시즘 이미지'를 내세우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실제 파시즘을 지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과장된 파시스트 흉내를 내어서 조롱하고 깎아내리는 것인지 애매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후자로 이해하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평양에서 2015년에 "북한 최초의 서방 록밴드 공연"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찍은 영화라 하여 상당히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게 하필이면 라이바흐여서 더 화제가 되었다는데, 2017년에 한국에서도 개봉하면서 남한에도 왔었다고 한다. 감독은 노르웨이 사람이었고 이미 북한에 자주 드나들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듯했다. 그가 작정하고 이 그룹을 섭외하고 북한 당국을 설득하여 데리고 들어가 공연까지 하는 과정이었다. 파시스트라는 비난을 받는 록밴드가 파시스트 국가로 비난받는 북한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기획 공연이었다.  

어떤 스타일의 밴드가 갔더라도 북한에서 갖가지 기술적인 제약이 따르고 문화 차이와 체제 특성으로 인한 돌발변수가 속출했을 것이다. 하물며 이런 특이한 록밴드였으니 준비 과정과 공연이 순탄치 않았을 것은 너무 자명했다. 굳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서 무엇을 보여주려 했는지 궁금한 영화였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태양 아래' 같은 다큐멘터리는 감독이 향후 북한 입국 가능성을 포기하고라도 체제의 민낯을 보여주는 고발의 성격이 있다. 이 노르웨이 감독은 계속 북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점이 있었기에 공연은 미니콘서트가 되었다. 그래도 파시즘을 에둘러 고발하는 음악임을 감안해서 북한에 '약간의 변화'를 이룬 것이라고 자평하는 다큐였는데 별로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중간에 코러스로 등장하는 북한 음대생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서양 남성의 우월감마저 느껴져서 다소 불쾌하기도 했다.  


북한 다큐이니 자주 한국어가 나왔다는 게 제일 재미있던 부분이었다. 노르웨이 감독이 슬로베니아 록그룹과 함께 공연하는 영화였으므로 주된 대사는 영어였고 자막은 리투아니아 어로 깔렸다. 다른 영화에서 잠깐이라도 영어가 아닌 외국어가 나오면 자막은 여전히 리투아니아어뿐이라 당황한 적이 있었다. 북한식 한국어가 나올 때는 리투아니아어 자막과 상관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게 고마웠다. 언어의 장벽이 가장 높은 영화는 그래서 리투아니아 영화다. 많지는 않지만 간혹 애국심 충만해 보이는 리투아니아 역사 영화가 개봉하는데, 자막 없이 리투아니아어만 나오니 접근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리투아니아 영화는 하나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드디어 나도 볼 수 있는 리투아니아 영화 한 편이 개봉을 했다. 'Sengirė (Ancient Woods)'라는 영화였다.

리투아니아 영화 'Sengirė'는 공화국 100주년을 겸해서 진행된 다양한 문화 프로젝트 중 하나의 결과물이다. 리나스 교수가 '대사가 하나도 없는' 자연 풍경을 담은 영화라고 추천을 했다. 리투아니아 숲 속 자연을 담은 영화라고 하기에, 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보기에 딱 알맞겠다 싶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리투아니아의 자연에 대한 이미지를 담았을 것이었다. 학생들이 농담 삼아 '내세울 것은 자연밖에 없다'라고 하는데, 중세 귀족들의 사냥터로 유명했다는 리투아니아의 숲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기획이었다. 영화관에는 올해 100살이 된 리투아니아 어르신들을 주제로 하는 다른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영화도 상영 중이었다. 치열한 역사적 배경과 스토리를 담은 영화도 있었지만 역시 자막 없는 리투아니아어 대사 때문에 그림의 떡이다. 한데 이 영화는 정말로 대사도 자막도, 전후 설명도 없이 그저 오래된 숲 속 모습을 찍어 편집한 거였다. 일종의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지만 설명이 하나도 나오지 않으니 그냥 '예술적 영상물'이다.  

영화관의 일곱 개 관 중에 이 지극히 '시(詩)적인' 영상에 두 번째로 큰 상영관을 배정해 하루에 두 번이나 상영하고 있었다. 스무 명 될까 말까 한 관객들과 함께 90분 동안 리투아니아의 깊은 숲 속, 정말 오랜 기간 존재하고 성숙해 온 자연의 모습을 창문으로, 망원경으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쳐다보았다. 진짜로 아무 말 안 나오고 심지어 배경음악도 없이 벌레나 새소리, 동물 발소리, 풀이 스치거나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만 들렸다. 계절과 날씨 변화 말고는 스토리도 없었다. 결국 적어도 3분의 1 이상 잔 것 같다. 심지어 곰이나 늑대가 나오는, 아마도 가장 드라마틱했을 듯한 장면에서 자고 있었다. 곰이나 늑대는 멀리서 찍어서 조용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현미경처럼 찍은 벌레들은 웅웅 소리도 그만큼 확성시켜 엄청나게 시끄러워서 또랑또랑 잘 보았다.  

영화 Sengire 홈페이지에 있던 사진

리투아니아는 숲과 호수의 나라다. 직접 깊은 숲까지 들어가 볼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에 숲을 사파리 하듯이 구경한 셈이다. 소련의 탱크가 진입하지 못하는 깊은 숲에서 리투아니아 빨치산들이 상당한 기간동안 대소련 투쟁을 했다. 리투아니아 답게 겨울 장면이 길고 여름도 비가 오는 장면이 많았다. 봄맞이 이벤트 삼아 보러 온 취지와 맞지는 않았다. 뭔가 '본연의 모습'을 담으려 노력해서 그런지, 잠들 정도로 재미없었지만 의미 있는 영화였다. 영화에 두세 번 등장하는 산속 통나무집 할아버지는 야외박물관에서 본 것과 흡사한 나무집(지붕만 슬레이트로 바뀌었다)에 살면서 한겨울에 사슴이 먹도록 감자나 사과를 펼쳐 두는 숲 지킴이 같았다. 숲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지 궁금해진다. 내가 보고 만나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이제 다 도시인들이고 간혹 자연을 찾아 쉬러 갈 뿐이다. 중세부터 근대, 현재까지도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변함없는 부분은 숲이고 그 속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북한도 아직 가볼 수 없고 그 리투아니아 깊은 숲도 도무지 가볼 수 없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곳들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이 기억에 남고 기록하게 되는 모양이다.  

영화 Sengire 홈페이지 사진이자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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