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리 Mar 18. 2018

9호 요새: 학살의 기억

2017년 10월 24일

카우나스에는 아홉 개의 요새 유적이 있다. 그중 외곽에 떨어져 있는 9호 요새는 박물관 겸 추모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서울의 서대문형무소 박물관 견학과 비슷하다. 소련 점령군과 독일 나치에 의해 당시 리투아니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사람이 학살당한 장소다. 가장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곳은 빌뉴스 외곽 감옥이었다고 한다. 빌뉴스의 KGB 박물관이 소련의 만행만을 기록했다면, 이곳은 나치의 학살과 소련의 만행을 같이 증언하고 있다. 2차 대전 초 1940년의 소련 점령, 이후 전쟁 중의 나치 점령, 다시 소련 점령을 거친 참혹한 역사와 아픈 기억을 기록하고 있다. 차 없이 대중교통으로는 단단히 마음먹고 가야 한다. 버스를 내려서 한참 주택가를 지나 음침해 보이는 지하도를 건너야 한다. 외딴 요새를 활용한 감옥 겸 학살 현장이기 때문이다.

9호 요새 전시관과 기념관. 교통은 불편하지만 잘 조성되어 있다.

바람이 거센 초겨울 날씨를 뚫고 도착하니 하필 난방이 고장 나 전시관 내부가 매우 추웠다. 분위기가 무거운 곳인데 춥기까지 해서 몸과 맘이 같이 오그라들었다. 부모님까지 동양인이 셋이나 방문한 경우가 드물어서 그런지 역사 전문가인 직원이 친절하게 가이드를 해주었다. 추모관 겸 전시관은 각자 둘러볼 수 있지만, 요새 유적과 감옥, 학살 현장은 가이드가 열쇠로 열어 가며 함께 다녀야 한다. 반지하의 요새와 미로같은 감옥은 가이드 없이는 다닐 수 없다. 둔덕에 낮게 자리 잡은 음산한 요새 유적 옆의 넓은 광장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추모 기념물이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이 자리에서 희생된 3만 명 넘는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물로, 하늘로 날아갈 듯 땅이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지대가 주변보다 살짝 높아 기념물 뒤로 하늘이 펼쳐지고, 각국 언어로 추모 문구를 새긴 석판이 있다.

요새 유적 옆에 크게 세운 유대인 홀로코스트 추모비

하필 난방이 안 되었던 전시관은 최근 지은 새 건물이다. 예배나 행사에 쓸 수 있도록 가운데는 의자를 놓았다. 벽을 따라 사진과 설명, 유품으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소련에 의한 지식인과 반소련 인사 체포와 학살을 자세히 전시하였다. 단기간의 학살로는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가 압도적이다. 원래 거주하던 유대인 외에도 폴란드에서 피신 왔다가 잡히고, 멀리서부터 이송되어 와서 죽은 서유럽 유대인도 많다. 프랑스에서 끌려왔던 유대인들을 기리는 방이 따로 있다. 홀로코스트는 너무 무지막지해서 남은 것이 없다 보니 설명도 분량이 적고 전시물도 많지 않다. 소련 치하에서 죽어간 리투아니아 희생자 기록이 훨씬 자세하다. 유대인 인구가 거의 없어졌기에, 살아남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보다 리투아니아인을 죽인 소련이 더 끔찍하다. 사진과 유품이 많고 세세해서 다 읽기에는 정신적으로 힘든 내용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려는 노력이 안타까웠지만, 난방이 되었더라도 추위를 느낄만한 내용을 난방도 없이 읽고 있자니 진짜로 너무 추웠다.

추모관을 겸하는 전시관 벽을 따라 수많은 사진과 유품이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전시 끝부분에는 1972년에 자유로에서 소련 지배에 항거하며 분신자살한 로마스 칼란타(Romas Kalanta)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타다 만 옷까지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 18살 청년이 반소련 시위와 항쟁의 상징이 되었다. 자유로에 남아 있는 분신 자리의 기념물은 화단처럼 보이는데 비틀거리는 발자국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진과 유품을 여기서 또 보자니 한국의 독립운동, 전쟁과 학살, 민주화운동까지 많은 부분이 겹쳐 보였다. 강대국 지배를 받아 가며 존립을 걱정했던 약소국 경험이 비슷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압제, 착취, 항거, 전쟁, 고문, 학살 같은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다. 아픈 기억을 보존해서 지속적인 독립과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다. 전시관을 나와 현장 보존하듯 복원 관리 중인 9호 요새로 걸어가면서 서대문형무소 들어갈 때와 흡사한 느낌을 받았다.

 수염 때문에 18세 같이 안 보이는 칼란타는 반소련 항쟁의 상징이다.

9호 요새는 말 그대로 아홉 번째 요새로, 1차 대전 이전 제정 러시아 통치기에 카우나스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러시아 차르의 명으로 건설한 요새의 하나다. 1호부터 8호 요새까지 8개의 요새를 먼저 카우나스 시를 둘러싸듯 가까이 건설했다. 그 바깥에 방어선을 하나 더 만들고자 9호부터 16호까지 또 요새를 건설하려고 했는데, 9호 요새 완공을 앞둔 즈음 1차 대전이 발발했고 차르는 독일에 밀려 후퇴하고 말았다. 기본 목적이 요새였기에 1차 대전 때의 대포와 무기, 2차 대전 때의 대포와 무기도 비교해서 전시되어 있다. 군사적 요새 기능도 했지만, 두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요새는 감옥으로 더 효용이 있었다. 정치범수용소, 유대인 포함 노동수용소, 범죄자 감옥, 궁극적으로는 학살 용도로 사용했다. 살아서 나간 사람이 거의 없어 잊혀질 뻔하였는데, 2차 대전 말에 수십 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목숨 걸고 탈출을 했고 그 절반 정도가 생존에 성공했다. 그들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발굴과 수집이 계속 진행되었다. 

9호 요새는 생생한 현장을 보존하면서 추모 공간을 겸하고 있다

가이드를 따라다니면서 두꺼운 철문과 벽, 음침한 공간들을 보고 설명을 듣다 보니, 어느 정도 숙지했다고 생각했던 리투아니아 현대사의 비극이 다시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가이드가 역사학도였기에 거꾸로 한국의 경험을 질문하기도 했다. 그도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정을 궁금해했다. 이미 많이 받은 질문이었기에, 가장 효과적인 '리투아니아 인들이 러시아를 어떻게 느끼냐'는 반문으로 대답을 했다. 역시 곧바로 수긍한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나라와 국민이 겪은 비극적 역사를 가장 마음 아프고 치열하게 느낀다. 유대인이 가장 많이 죽임을 당한 9호 요새에서 나치보다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을 압제한 소련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선명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느끼는 아픈 역사를 잘 관찰할 수 있는 장소였다. 

스기하라 영사 기념을 겸하는 일본의 추모실도 있다.

한국 관광객이 늘고 있지만 여기까지 와본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리투아니아 국민들도 젊은 세대는 많이 오지 않는 장소일 것 같았다. 아픈 역사와 기억은 잊어버리고 싶기 때문에, 열심히 가르쳐주지 않으면 의외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녀와서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9호 요새에 다 가 봤느냐고 물어봤는데, 역시 리투아니아 학생들 중에 가본 학생은 턱없이 적었다. 우리나라 학생들도 숙제가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가 보는 경우가 많지 않을 것이다. 힘없고 약해서 당하기만 했던 역사에 너무 집착하고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은 분명히 영향력이 있다. 한 번쯤은 제대로 알 필요가 있을 텐데, 어디서나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이전 05화 유대인의 영웅 스기하라 일본 영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