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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6. 2018

유대인의 영웅 스기하라 일본 영사

2017년 10월 18일

카우나스의 숙소인 국제기숙사 창문으로 마주 보이는 살짝 경사진 언덕은 호젓하고 전망 좋은 동네다. 비교적 큰 단독주택들이 줄지어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카우나스가 수도이던 시절, 외교사절들이 대사관이나 영사관을 꾸려 사무실 겸 관저들이 있던 동네이다. 대부분 고급주택이 된 조용한 동네에 당시 영사관 모습을 보존하면서 기념관이 되어 있는 주택이 하나 있다. 바로 구 일본영사관으로, 지금 이름은 '스기하라 하우스(Sugihara House)'이다. 1930년대 후반에 부임하여 정보수집 활동을 하다가 소련 점령 직후 영사관이 폐쇄되면서 베를린으로 떠난 지우네 스기하라(Chiune Sugihara) 영사를 기념하는 장소다. 스기하라 영사는 나치 독일과의 동맹으로 추축국이 일원이었던 일본의 외교사절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스기하라의 이름은 동양의 쉰들러, 리투아니아 유대인들의 구원자이다.

기념관에서 나눠준 팜플렛에 있던 개관 초기 사진. 지금은 저 앞의 벚나무 묘목들이 꽤 자랐다.

리투아니아에 대한 검색을 시작했을 때부터 눈에 띈 이름이 스기하라 영사였다. 2차 대전 당시 리투아니아에는 유대인 인구가 많았다. 원래도 많았던 데다 1930년대 말부터 독일과 폴란드에서 나치를 피해 넘어온 유대인들도 급증하고 있었다. 일본 본국의 훈령 없이 자기 의지대로 유대인들에게 2천여 건의 가족 동반 통과비자를 발급해 주었다. 가족 단위였으니 줄잡아 6천 명 이상의 유대인이 통과비자 덕분에 리투아니아를 탈출하여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일본까지 가서 목숨을 건졌다. 

스기하라 영사 사진과 생명의 비자 도장이 인쇄된 팜플렛

일본이 목적지는 아니고 통과비자였지만 어쨌든 유대인들에게 그 비자는 생명줄이었다. 어디로든 가지 않고 유럽 내에 머물러 있다가 나치 점령 하에 들어갔다면 학살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명의 비자 (Visa for Life)'라고 불린다. 당시 비자는 꼭 본인이 손으로 써야 했다. 생명줄을 잡는 심정으로 집 앞에 늘어선 유대인들에게 쉴 틈 없이 비자를 써주고, 영사관이 폐쇄당한 후에 잠깐 머물던 시내의 메트로폴리스 호텔에서도 비자를 써주고, 마지막에 기차가 떠나는 순간까지 기차역에서 비자를 써주었다. 정작 스기하라 영사 본인은 패전국 외교관이었으니 베를린에서 억류되는 등 힘든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본국의 훈령을 무시했으니 이후 일본 외교관 경력도 이어가지 못했고, 러시아어 전문가였으므로 러시아 관련 사업을 하다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스기하라 하우스는 많은 일본 관광객이 굳이 카우나스를 찾는 이유 중 하나이다. 일본대사관이 카우나스에 자주 와서 이런저런 행사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교통이 닿지 않는 호젓한 주택가라, 작정하고 걸어서 방문해야 한다. 부모님과 함께 갔었는데, 동양인 방문객이면 으레 일본인이었기 때문인지 학생인턴인 듯한 리투아니아인 직원이 일본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짧은 필름을 보여주었는데 리투아니아어, 영어, 일본어로 나온다. 사무실이 있던 1층을 당시처럼 복원해서 비자 사본도 실감 나게 놓여 있다. 가족들 이야기, 이 비자 덕분에 생존한 유대인들의 기억, 사후 이스라엘 정부에서 수여한 훈장 등 의미를 잘 살려 전시해 놓았다. 

1층의 사무실을 복원해 놓았다. 책상 위에는 비자 사본도 있다.

용감한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일본인이니 국가로서의 일본의 이미지 개선에 엄청난 공헌을 하고 있다. 일본인 방문객이 대부분이라 일본 전통 장식품이나 그림, 사진도 많고 곳곳에 일본 기념품이 예쁘게 비치되어 있었다.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핀을 꽂을 수 있는 커다란 일본 지도 패널도 있다. 훌륭한 일을 하신 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같은 시기에 고통이 극에 달했던 한국의 역사적 기억이 선명한 입장에서 마치 일본이 나치의 손아귀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해낸 선량한 인도주의 국가였던 듯한 분위기는 편하지만은 않았다. 


2016년 가을에는 스기하라 영사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 상영회가 있었다. 제목은 외교가에서 ‘기피인물’을 칭하는 라틴어 용어다. 폴란드에서 촬영한 영화로, 일본, 이스라엘, 미국 등 다국적 후원을 얻어 제작한 영화라고 한다. 대부분 일본어 대사이고 자막이 리투아니아 어였던 관계로 그림만 보고 내용을 따라갔다. 

영화 'Persona Non Grata' 포스터

줄거리를 대충 알고 있었기에 눈치껏 끄덕이며 보고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심하게 거슬리는 장면을 발견하고 말았다. 스기하라 영사는 최후까지 최대한 많이 살리기 위해 비자를 쉴 새 없이 만들었지만, 일부 유대인 친구들 중에는 그걸 받고도 며칠 늦는 바람에 탈출에 실패한 일화가 나온다. 탈출을 못하고 나치에 잡힌 한 가족 중에 어린 아들만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생존하여 연합군을 만나는 장면이 있었다. 스기하라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아사 직전의 어린아이 앞에, 동북아시아 계통이 틀림없는 동양인 연합군 군인이 나타나 '이제 걱정 마, 넌 살았어'라며 안심시키고, 아이는 스기하라 영사의 이름을 부른다. 마치 일본 군인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해 나치로부터 구출해준 듯한 장면이다. 설령 미국이나 유럽에 살던 일본계 교포라 하더라도 당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서 적국인 일본계 인구는 격리수용이 될지언정 군인으로 참전할 수는 없었다. 한국은 일본 식민지였으니 한국계도 아니고, 그럼 중국계일수도 있지만 극소수였을 것이다. 괜히 트집 잡아서 즐거울 일도 아니기에 인간적인 훌륭함을 돋보이는 영화적 장치라고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카우나스 기차역의 스기하라 영사 기념 동판

리투아니아에서 일본의 이미지는 대단히 긍정적이고, 스기하라 영사의 일화도 큰 몫을 하고 있다. 카우나스의 스기하라 하우스뿐 아니라 시내의 메트로폴리스 호텔과 기차역에도 그의 얼굴을 새긴 동판이 붙어있다. 빌뉴스에는 '스기하라 거리'도 있다. 객원교수로 소속되어 있던 VMU의 동아시아학부도 어쩌면 그 덕에 생겨난 것이다. 동아시아학부의 대부분의 연구와 행사는 아시아연구센터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센터가 원래는 일본연구센터였고, 다름 아닌 스기하라 하우스 2층에 있었다. 구 일본영사관을 터전 삼아 일본의 후원으로 시작한 연구센터다. 새로 지은 본관으로 이사오지 않았다면 나도 스기하라 하우스에 연구실이 있었을 것이다. 그 2층도 기념관으로 리모델링 중이었다.

영사관 폐쇄 후 며칠 머물면서 계속 비자를 썼다는 메트로폴리스 호텔. 자유로 한가운데 위치한다.

2017년 9월에는 일본, 이스라엘, 미국 등지의 여러 단체의 후원을 모아 '제1회 스기하라 주간 (Sugihara Week)' 행사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카우나스 곳곳에서 스기하라 영사 이야기를 배경으로 강연, 전시, 워크숍이 이어지고, 일본에서 공연자들이 와서 이곳 예술가들과 함께 문화공연도 여러 번 하였다. 흥미로운 순서가 많아서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참석했다. 그러면서도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일본 공공외교의 더없이 유용한 소재가 되는 모습은 못내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었다. 

2017년 9월에 제1회로 열린 '스기하라 주간' 오프닝 공연 이모저모

일본의 아베 총리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홀로코스트 추모관인 야드바솀(Yad Vashem)에서 스기하라 영사 이야기를 하며 평화국가 일본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당시 스기하라 영사는 일본 외교관 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오늘날 일본에게는 더없는 외교자산인 것이다. 2018년 1월에 아베 총리가 발트 지역 순방을 하면서 카우나스를 일정에 넣었고, 역시나 스기하라 하우스에 가서 그 비자 쓰던 책상에 앉았다. 

물론 사람들이 일본에 관심을 갖는 일차적인 이유는 역사적인 훌륭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만화책,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문화이고 기모노, 초밥 같은 이색적인 일본 문화이다. 그래도 일단 관심이 깊어지면 곧 역사, 정치, 사회를 보게 된다. 간혹 학생들이 '한국 사람들은 왜 일본을 안 좋아하나요?' 같은 질문을 한다. 일본 같은 좋은 나라가 식민지배를 했으니 도와주고 발전시켜 준 것 아니냐는 궁금함이 내포된 질문이다. 그러면 짐짓 가볍게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러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니?'하고 되묻는다. 그러면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이 곧바로 '아하~'하면서 수긍한다.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이럴 땐 또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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