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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09. 2018

낯선 나라 리투아니아

2017년 8월 25일

학생 시절 교환학생이나 방문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반년 정도씩 체류한 경험이 있었다. 수년을 체류할 계획으로 외국을 나온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게 리투아니아라는 나라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낯설지만 그래도 글로벌 시대이고, 유럽연합 회원국인 유럽 국가이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갖추고 있으니 체류를 위한 정착 과정은 미국이나 여기나 큰 차이는 없기를 바랐다. 미국에 갔을 때도 숙소 정리나 물품 구매, 은행 계좌, 교통 카드까지 기본적인 정착은 사나흘 내로 끝내고 무난히 적응을 했었다. 다행히 이곳은 활동 반경이 작아서 그런지, 기본적인 절차는 오히려 더 빨리 진행이 되었다. 도착 다음 날 아침에 방을 청소하고 조금씩 짐을 풀고, 생필품을 사러 마트에 두세 번 왕복하고 나서 첫 세탁을 돌리고 나니 일단 방에서의 생존이 가능해졌다. 그 와중에 쓰레기통이니 샤워 커튼이니 자질구레한 문의사항을 열심히 들어준 기숙사 직원들의 성의가 한결 더 마음을 놓게 해 주었다. 전기와 물이 잘 나오는 것만 해도 감사하는 것이 집 떠난 자의 바람직한 자세임을 생각하면 정착과정은 수월했다. 그림같이 개인 날씨도 무난한 적응을 응원해 주었다.

맑게 개이면 우중충하던 거리도 순식간에 반짝거린다. 카우나스 도심 보행자 거리

대다수 한국인에게 리투아니아는 미지의 나라이다. 소위 발트 3국이라 부르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중에서는 이곳이 가장 크고 인구도 많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유럽을 묶어 소개하는 가이드북에 등장하지도 않을 정도로 아직 존재감이 미미하다.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의 한국학 객원교수 파견 대상지 목록에서 이 국가명을 처음 봤을 때는 위치 감각도 없었다. 파견 신청서에 쓰면서도 낯선 국가명과 더 낯선 학교 이름을 두어 번 확인해야 했다. 전혀 모르는 곳이었기에 신비감과 모험심을 자극했다. 왠지 이름이 매력적이라는 생각도 했고, 파견을 가게 되면 인생에 꽤나 드라마틱한 경험이 되리라는 상상을 했었다. 리투아니아에 도착한 후에도 한 달 가까이 매일매일이 신기했다.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국가들은 유럽에서 경제나 사회 발전의 후발주자이다. 덕분에 일상생활 속의 전산화된 시스템은 웬만한 미국 도시보다 오히려 훌륭하다. 발트 국가 중에서 에스토니아는 국내 전산화 수준이나 디지털 산업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행정부터 개인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사용 수준이 대단히 높다. 와이파이나 인터넷 속도가 세계 어느 곳보다 빠른 한국에 살다 왔기에 그게 놀랍지 않을 뿐이다. 한국에 대사관이 없는 리투아니아의 특성상 일단 관광비자로 들어와서 체류비자를 신청해야 하는 과정은 번거롭다. 전산화가 되고 있고 이민국 직원들도 친절했지만, 신기하게도 어느 나라나 비자 관련한 행정은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자유 이동이 가능한 솅겐 지역 내에서 모두 적용되는 체류비자라 한 번 받으면 유럽 내 여행은 크게 수월해진다. 첫 해를 지나 두 번째 해에 접어들면서는 비자가 아닌 단기 체류증이 필요했다. 즉 해마다 이민국을 수 차례 오가야 했다. 여기서 겪은 행정적 불편함이 리투아니아의 행정에 대한 거의 유일한 불만 사항이었다. 

매일같이 드나들게 된 숙소 근처 미국식쇼핑몰(대형마트) 아크로폴리스, 피트니스 센터 때문에 드나들게 된 잘기리스 농구장

비자나 체류증 관련해서 이민국을 왕래해야 했던 불편을 제외하고는 다른 준비나 적응에 불편함은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쓸 이동전화를 따로 만들었다. 한국처럼 서너 개의 통신사들이 경쟁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유럽연합 국가 어디서나 똑같이 데이터를 쓸 수 있는 점은 더없이 마음에 든다. 전화나 문자보다 데이터를 주로 쓰는 성향은 한국보다 이곳이 더 확연하다. 온 국민이 페이스북을 기본적인 소통 수단으로 애용하고 있다. 냉전 종식과 함께 체제 전환을 겪고 빠른 속도로 서구화(서유럽화)하고 있는 과정에서 분야에 따라 변화와 발전 속도가 차이가 있었다. 예상외로 수월해서 감동적인 경우, 예상외로 열악해서 당황하는 경우가 교차하였다. 


일단 도시와 건물들의 겉모습부터 감동스러움과 당황스러움이 공존하고 있다. 작지만 생활에 필요한 것은 다 있고 콘서트홀이나 오페라, 미술관 같은 문화시설까지 다 잘 갖추어져 있다는 점은 감동적이었다. 조용하면서도 활기가 있고, 옛 모습과 현대적인 발전이 공존하는 동유럽의 변화를 일상 속에서 체감할 수 있는 규모와 수준, 속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세계대전 전후 또는 소련 시기 것이라 간간이 폐허에 가까운 대형 건물이 있다. 위험해 보일 정도로 방치된 빌딩들이 과거의 트라우마를 반영하듯 남아있다. 그런 것들을 허물고, 정리하고, 현대적이면서 예쁘게 바꾸는 작업이 열심히 진행 중이다. 즉, 도시 곳곳이 한국의 1980년대 같은 공사판을 방불하고 있었다. 

작은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큰 공장 폐허는 구소련의 것이다. 오래된 건물들은 리모델링하고, 냉전시대의 다리도 장식을 살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전체가 꽃단장을 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날 정도로 온통 공사 중인 것이 인상적이었다. 2015년에 선출된 카우나스 시장이 도시 개선에 더욱 적극적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런 낡은 건물과 도로를 드디어 개보수하는 과정을 환영하고 기대하고 있었다. 변화와 발전, 특히 영국이나 독일처럼 서구화되는 것이 리투아니아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의 희망이다. 물론 러시아의 존재가 안보 위협이고 국내외에 정치경제적 이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의 많은 국가들과 달리 테러나 난민 문제에서는 벗어나 있고 대체로 상황이 안정적이다. 역사적으로 시련이 많았지만 이제 안정된 환경을 누리며 변화하고 발전하고자 한다. 


빠른 발전 경험이라면 빠지지 않는 한국에서 흔히 있는 논쟁거리도 있다. 개축하는 건물의 모습을 얼마나 보존하느냐 개선하느냐의 논쟁도 있고, 관료제 윗자리의 어른 세대들이 일하는 방식에 대한 신세대들의 불만과 한탄도 있다. 이 공사들은 무슨 돈으로 하는지, 나중에 빚더미에 앉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도 있다. 숙소로 머물렀던 도심의 국제기숙사에서 도보 5분 거리에는 대형 쇼핑몰 아크로폴리스(Akropolis)가 있었다. 미국식으로 의류, 잡화, 식당가, 대형 슈퍼마켓까지 갖추고 있는데, 주위의 상권을 순식간에 죽여 버렸다는 비판을 함께 받았다. 차 없이 사는 나 같은 체류자에게는 생명줄 같은 쇼핑몰이지만, 거리의 작은 상점들은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하지만 길고 추운 겨울까지 생각하면 거리의 상점이 경쟁하기는 어려운 강력한 상대임이 틀림없다. 다행히 새 시장의 추진력으로 도심 환경을 개선하는 공사들 덕분에 야외의 카페나 식당, 상점들도 새로 단장을 해서 재기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쨌거나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공감대는 견고하다. 

아크로폴리스는 다 갖춘 쇼핑몰이었다 - 슈퍼마켓부터 전자제품, 의류잡화, 식당, 카페, 영화관, 아이스링크, 볼링장 등등

리투아니아가 한국처럼 빠른 발전을 추진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국 같은 발전 속도는 인구 증가부터 시작해서 국가의 정치와 경제 모든 분야에 발전을 가속할 추진력이 있어야 한다. 유럽연합 가입 후 오히려 젊은 인력이 유출되면서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은 개발독재 시절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반영한다. 러시아와 독일 등 강대국 사이에서 이리저리 밀리고 찢긴 역사는 한국이 그랬듯이 지리적인 허브의 가능성도 함께 보여준다. 하지만 항공과 통신이 발달하는 요즘 세상에서 지리적인 위치가 가지는 의미는 예전보다는 줄어들었다. 아직도 폐허로 눈에 뜨이는 소련 시절의 상처들을 다 덮고 뚜렷한 속도와 추진력을 내려면 한국처럼 좀 절박하고 투쟁적인 상황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곳은 그전에 먼저 유럽에 편입되면서 북유럽과 독일식의 생활양식과 가치, 문화가 되살아나거나 재도입되었다. 이런 다른 환경은 다른 방향으로 효과를 내지 않을까? 여유롭고 잘 보장된 생활수준으로 한국보다 소위 ‘행복지수’는 높아 보이는데, 동시에 한국을 능가할 지경의 엄청난 주류 소비량과 세계 1위를 다투는 자살률은 또 다른 측면을 암시한다.

카우나스 구시가지는 맑은 여름날이면 거리 전체가 카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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