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리 Apr 24. 2018

봄학기 개강과 여유 속의 활기

2018년 2월 1일

1월 말에 시작하는 봄학기는 2학기이라 새로운 시작 느낌은 아니다. 날씨도 어둡고 추운 겨울의 끝자락이라 차분하게 시작하는 편이다. 그래도 연말연시에 집에 갔던 학생들이 돌아오면서 고요했던 겨울 거리에 생기가 돌았다. 출퇴근에 얽매이지 않는 객원교수의 특권을 살려, 조금씩 살아나는 자유로의 카페들을 전전하면서 학기를 시작했다. 겨울 추위는 뒤늦게 온다는 요즘 추세에 걸맞게 2월 기온이 1월보다도 낮아져서 한낮에도 영하에 머물렀다. 조금 걷다가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축축한 추위에 항복하고 따뜻한 커피나 달콤한 디저트를 찾아 카페로 발길을 옮긴다. 늦겨울을 제대로 경험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조금만 경험하고 봄이 일찍 왔으면 좋겠다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그렇지만 예보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날씨 앱은 오히려 2월 중순으로 갈수록 더 추워질 거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전설의 영하 20도를 2월 말에 체험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런 것도 경험이라면 경험이겠지만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학생들이 많이 가는 베로 카페는 자유로 근처에 워크숍 공간을 갖춘 큰 하우스 매장도 있다.

봄학기는 교수도 학생도 첫 학기에서 이어지는 관성대로 흘러간다. 바빠지는 것 같아도 가을학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잠시 정체되어 있던 일상을 지속하는 것뿐이다. 수업 시작되니 1월보다는 당연히 바쁘지만 자고 먹고 운동하고 적당히 저녁 약속을 만들고 즐기는 데에 별 지장이 없다. 바쁘다고 해도 철저히 '근무 시간 이내'의 낮시간에 국한된다. 저녁 있는 삶이 완벽하게 보장되기 때문에 그런 삶을 추구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소소한 기쁨과 생활의 여유를 결코 놓지 않는 문화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유럽식'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심지어 객원교수인 나 같은 외국인 손님(용병?)은 강의 이외에 행정적인 일도 없고 시간도 더 자유롭다. 이곳 사람들조차도 부러워할 판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한국에서 숨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친구들과 모든 또래 가장들, 학부모들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마저 생긴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또래 다수의 생활과 전혀 다르게 지내다 보니 생활 습관도 달라지고, 몸이 먼 만큼 생각과 우선순위도 점점 달라진다. 다수가 이어가고 있는 체계화된 삶과 문화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생활을 하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선택과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준 기회의 열쇠는 박사학위였다. 학위의 의미는 개인마다 다를 거다. 학위를 취득한 대다수는 이렇게 활용하지 않는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상당수 동료들은 학계에 남아, 가능하면 한국의 대학교에서 교수의 길을 가기를 희망한다. 나에게 박사학위증은 많이들 가는 그 길로 더 빨리 나아가라는 이정표가 아니라, 잠깐 멈추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다시 생각하게 준 일종의 마침표로 작용했다. 그것만으로도 꽤 가치 있어서 제 몫은 하는 것 같다. 학위 덕분에 주어진 자유로움을 어디서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의미도 찾아가면서, 즐기기도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그런 고민이나 생각을 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를 갖기 힘들다. 박사학위라는 좋은 도구가 주어졌으니 이왕이면 잘 쓸만한 곳을 찾아야 하는데, 그저 성실하기 바쁜 한국에서는 뭘 하고 싶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리투아니아에 오면서 쳇바퀴 같던 한국에서의 일상을 벗어나고 숱한 관계로 바빴던 시간들이 비워졌다. 온전히 혼자 채우고 즐겨야 하는 매일을 살다 보니 그 시간과 자유가 너무 소중하고 좋았다. '의미 있으면서도 즐겁고 모두에게 좋은 일'은 무엇일지 치열하게 생각해볼 여유와 시간이 주어졌는데, 막상 멍석이 깔리니 게을러져서 그저 즐기게 된다. 그래서 한국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또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자꾸 드는 모양이다. 다시 한국에 들어가거나 해외에서 엄청 바쁜 일을 찾을 수도 있을 거다. 그런 쳇바퀴에 재진입해서 수많은 관계 속에 나를 위치시키려면 그런 비용을 감수할 만큼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일을 만나야만 할 듯하다. 열심히 알아봐야 하는데, 그러다가 여기서 살아가는 리투아니아 사람들을 보면 사람이 꼭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면서 다시 유유자적 즐기고픈 마음이 든다. 


새로운 학기를 맞아 조금씩 활기를 띠어 가는 거리를 내다보면서 나도 안팎으로 더 활기를 갖고 분발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먹는다. 너무 멀고 큰 목표를 정하는 것은 매일매일의 일상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 너무 멀면 좀 다가가도 계속 멀기 때문에 재미도 없고 의욕도 나지 않는다. 거창한 목표가 확실히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일단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일부터 차근차근히 하는 게 좋다. 그러면서 차차 가치 있고 즐거운 목표를 찾는 도구로 삼는 거다. 한국학 수업도 그런 일이고, 한국 전공 학생들을 돕거나 한국을 잘 알리는 기회를 만드는 일도 그런 일이었다. 한국에서 공부나 일을 할 때는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문제를 풀고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일이 많았다. 복잡한 세상에서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과제를 그날그날 받아 척척 해내기에는 경륜도 역량도 영 부족해서 오히려 움츠러들었다. 스스로 만들거나 선택해서 일을 하면서 원하는 방향을 찾고 고민을 쌓아가는 과정이 결핍되어 있었다. 해외에 나오니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게 거의 없어졌고 웬만하면 스스로 만들거나 선택하게 되었다. 진짜 스스로 방향을 찾으며 고민해서 채워 넣어야 한다. 그걸 잘해서 자유로운 시간들을 채워 가야만 이 여유로워진 일상에 대해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14화 봄이 온다? 염원을 담은 개강 준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