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6일
VMU의 봄학기는 2월 1일에 시작한다. 새 학년도가 아니라 2학기이므로 9월 초처럼 분주하지는 않다. 한국에서는 3월에 개강을 할 때면 봄기운이 완연하다. 아직 도무지 봄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1월 말에 개강을 준비하려니 뭔가 억울했다. 겨울 내내 눈보다 비가 많이 오고 온난한 편이었기에 별다른 한파 없이 이대로 봄이 오면 좋겠다고 내심 바랬다. 기대하면 실망하는 법이지만, 일단 동트는 시간이 빨라지면서 해가 길어지고 공기도 덜 차갑게 느껴졌다. 개강의 마법이라도 있어서 봄이 당겨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동아시아 학부장이었던 아우렐리우스 교수가 집에서 조촐한 '개강 전 파티'를 열었다. 학부장이자 아시아 센터장이고 일본 전문가로 매우 바쁘지만 학기마다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교수로 뽑히는 선생님이었다. 학기말이나 개강 전에 집으로 학부 교수진과 교직원을 초청해서 작은 파티를 했는데, 번번이 일정이 어긋나다가 처음 참석했다. 리투아니아의 일반 가정집을 방문하는 게 처음이었다. 카우나스 외곽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작은 2층 주택이었다. 리투아니아에서 주택을 소유한 모든 가정이 그렇듯 일 년 내내 어디 한 곳은 자체 수리 중이다. 웬만한 공사는 알아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영원한 리모델링' 중인 아담한 집이었다.
할머니와 두 딸까지 다섯 식구가 사는 집의 부엌 겸 식당에 동료 교수, 강사, 교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이런 홈파티는 뭐라도 한 가지씩 가지고 오는데, 다 젊은 사람들이다보니 대부분 음료나 디저트를 가져온다. 나도 한국에서 싸 온 전통식 쌀강정을 가지고 갔다. 아시아 음식을 좋아하는 아우렐리우스는 채식주의자가 셋이나 되는 참석자들을 고려해 채식으로 인도음식 사모사를 만들었다. 수다와 함께 식사보다 많은 음료와 디저트로 저녁을 채웠다. 초등학생 딸들이 방 구경도 시켜주고, 식사 후에 시간 보내기 좋은 보드게임을 하다가 헤어지는 방식은 한국의 친구네 홈 파티나 다를 바 없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
수다 중에 다양한 화제가 올랐지만 역시 날씨 이야기가 큰 화제다. 나 말고도 대만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대만센터 조교도 있어서 날씨 투정이 없을 수 없었다. 긴 겨울과 곧 다가올 봄에 대한 이야기가 위로와 자조를 섞어 풀려나온다. 긴 겨울을 지나도 5월, 6월까지도 계속 봄을 기다린단다. 겨우 봄인가 하고 이제 여름을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9월이 지나서 다시 겨울이 온단다. 그래서 겨울-봄-겨울의 두 계절이라는 농담도 있다. 온난화 때문인지 날씨가 이상해져서 겨울에는 눈 대신 비가 오고, 여름에도 햇살 대신 비가 온다는 한탄도 했다. 겨울이 이제 많이 춥지 않아서 철새 이동도 불규칙해졌고 나무도 제때를 모르고 싹이 난다는 걱정도 있었다. 1월보다 2월, 2월보다 3월이 추워서 중앙난방을 언제 꺼야 하는지 다시 고민해야 하고, 이제 4월 초 부활절의 눈은 너무나 자연스럽다고들 한다.
어쨌거나 모두들 봄과 햇살을 기다린다. 학부생 시절 합창단 동아리에서 유럽 민요를 불러보면 4월이나 5월의 봄날에 대한 찬양이 너무 많아서 이상했었다. 여기 오니 4월, 5월에 화사한 봄날이 되면 누구나 노래하고 춤출 법하다. 리투아니아에서는 하루하루 봄이 다가오는 과정이 순차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와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발트에서는 그게 아니라 천천히 "봄이 오는 단계가 보인다"는 것이다. 느리게 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삼 돌아보니 치우느라 쌓아 올린 눈 무더기가 작아지고 있고, 그 물이 고이면 거리 모퉁이에 웅덩이가 생긴다. 그리고는 처마와 홈통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지나가는 사람의 머리를 적신다. 땅이 드러나면 희한하게 바로 푸른 풀이 보인다. 구름이 걷히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곧 진짜 햇살이 비치는 횟수도 많아질 것만 같다.
학교에서는 일출이 빨라지고 일몰이 느려져 낮이 길어지는 과정을 체감할 수 있다. 내 수업은 대부분 오후 시간이었다. 오후 5시경에 하는 대학원 수업이 끝나면 너무 캄캄해서 야학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저녁이 캄캄한 것은 괜찮은 편이었다. 대부분 어학 강좌는 오전이다. 어학 강사들이 고충이 많았다. 아침 8시나 8시 반에 시작하는 수업이 많은데, 아무리 독려해도 아침은커녕 새벽도 안된 것 같은 캄캄한 시간이라 출석률이 영 저조하다는 거였다. 안타깝지만 내가 학생이라도 일어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맞은편에 카우나스에서 유일한 러시아인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초등학교 수업도 8시 전후 시작이었다. 어둡다 보니 부모님들이 차로 데려다주는데 마치 한국 대형교회의 이른 새벽기도회 주차전쟁 같았다. 캄캄한 시간의 아침 수업을 한 달은 버텨야 한다. 그 후에야 해 뜨는 시간이 아침 수업 시간에 맞추어 빨라진다. 그러다가 춘분이 지나면 급속히 낮이 길어져 어느새 밤이 짧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