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14일
어둡고 긴 발트의 겨울은 정신건강에 정말 강적이다. 북유럽이 다 그렇겠지만, 극지방이 아닌 발트해 연안국들은 약간 중간적인 애매함 때문에 더 우울한 것 같다. 최근 몇 년 간 온난화 때문인지 눈보다는 비와 진눈깨비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게 더 안 좋다. 리투아니아의 겨울 이미지였다고 하는 새하얀 눈밭도 보기 힘들어졌다. 영하 20도를 밑돌기 마련이었다는 한파는 줄어들어서 다행인데, 대신 회색빛으로 질척거리는 어두운 겨울이 되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해마다 겨울이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12월 말과 1월이 제일 추웠었는데 이제는 1월보다 2월이 더 춥다. 1월과 2월 중순까지 한파라 할 만한 것이 없이 영상과 영하를 오르내리며 흰 눈보다는 진눈깨비와 비가 많이 온다. 그러다가 2월 말, 심지어는 3월에 더 추워지면서 함박눈이 오는 식이다. 그 눈이 결국은 4월에도 몇 차례 왔고, 5월까지도 눈 오는 장면을 구경하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4월과 5월 초의 눈은 나만 신기해한 게 아니라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진심으로 황당해했다.
겨울에는 비보다 눈이 낫다. 어차피 똑같이 흐린 하늘이니, 땅이라도 하얗게 빛나는 게 위안이 된다. 물론 눈이 쌓인 뒤에 해가 나서 밝게 빛나면 더없이 아름답겠으나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비와 진눈깨비로 질척거리다가 반쯤 얼어서 더 미끄러워지는 것보다는, 치우느라 수고스럽더라도 눈 덮인 모습이 보기도 좋고 쾌적하다. 물론 눈이 적당한 수준으로 올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좀 윗 세대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예전에 수십 센티씩 눈이 쌓여서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던 겨울을 이야기하면서 요즘은 눈이 거의 안 온다고들 한다. 혹시 수십 센티가 될 정도로 눈이 많이 와서 모든 것이 마비된다면 그 눈이 쓰레기 더미로 보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요 몇 년 동안 발트 지역에 그 정도의 눈은 볼 수 없었다.
대부분 비와 진눈깨비다. 그러다 서울에서 돌아온 후 며칠 동안 웬일로 눈이 내렸다. 한국에서 폭설 오듯 대량으로 갑자기 오는 게 아니라 안개비가 눈으로 변한 것처럼 조금씩 계속 왔다. 딱 담요 두께로 오고 잠시 그친 사이에 산책을 나가면 꽤 멋진 눈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영어로 맞춰둔 날씨 앱에 'flurries'라고 나오는데, 진눈깨비가 살짝 더 언 것 같은, 함박눈과는 거리가 있는 소심한 눈이었다. 쌓이면 밀가루처럼 꼼꼼히 덮이는 느낌이다. 이런 눈은 산책 중에 다시 내리더라도 우산이 의미가 없다. 옆으로 날려 오기 때문이다. 긴 어둠과 함께 젖은 눈, 싸라기눈이 오는 리투아니아의 겨울도 분명 추억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이 풍경도 잘 봐 두자는 생각으로 산책을 다녔다.
오래간만에 온통 하얗게 된 카우나스 구시가로 산책을 갔다. 12월 말의 동지가 지난 지 한 달이 다 됐지만 아직 8시 반에 해가 뜨고 오후 4시면 어두워진다. 어둠과 상관없이 하루를 잘 채워보자 다짐하다가도 산책이나 장보기는 그나마 해가 있을 때 서둘러 다니게 된다. 한국에 다녀온 시차 때문에 아침 일찍 눈이 떠졌지만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려서 오전 9시경에 산책을 시작했다. 주말인 토요일이었는데, 9시가 넘어도 어둑하고 한산해서 새벽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자유로는 하얗고 조용한 적막이었다. 다행히 보행자 전용이라 자동차 때문에 눈이 시커메지지는 않는다. 눈이 잠시 그친 오전의 깨끗한 눈길에는 발자국이 몇 개 없었다. 곧 한겨울에도 멈추지 않는 도로 공사 소리가 시작되기는 했지만, 웬만한 가게들이 다 문을 여는 오전 11시 정도는 되어야 겨울 주말이 시작된다.
언제든 다시 눈이 날릴 기세였으므로 방수가 되는 바람막이를 덧댄 패딩 점퍼로 무장하고 구시가까지 직진으로 걸었다. 아직 크리스마스트리와 성탄 장식 일부가 남아서 연말 축제의 기억을 이어가고 있었다. 성탄절 당일이나 이후에 행사가 더 있었는지, 구시가 광장에 눈사람 조형물이 더 생겼다. 한국에서는 도무지 신을 일 없던 방수 패딩 부츠까지 신었으니, 자신만만하게 눈밭을 걸어서 강변의 성채까지 갔다. 그나마 덜 춥고 눈도 잠깐 그친 주말 오전이 기회다 싶어서 산책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었다. 빨간 벽돌의 성채와 하얀 눈이 예쁜 대조를 이루리라 기대했다. 과연 벽돌 중세 성채는 흰 눈밭 사이에서 선명하게 자태를 뽐냈다. 햇빛을 받았다면 더 예뻤겠으나, 흰 땅과 회색 하늘 사이에 끼인 성채도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주었다.
한 바퀴 돌아 강변까지 나가니 눈밭에서 구르고 미끄러지면서 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아빠들이 매우 그럴듯한 나무 썰매를 가지고 나와서 밀고 끌고 옮겨주고 있었다. 강물이 꽁꽁 얼 정도까지 찬 기온은 아니어서 강에는 조각난 얼음판들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강 위의 얼음판을 지치는 썰매는 아니고, 그 바로 앞 완만한 경사지에 쌓인 눈이 자연 썰매장이 되었다. 몇몇 아빠들과 아이들이 나와 노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는 했는데, 그 넓은 두물머리 공원 여기저기에 몇 명 손에 꼽을 정도의 숫자였다. 어딜 가나 사람이 많은 서울의 주말 공원들에 비하면 빈 공간이 너무 많고 그저 흰 눈이 채우고 있었다.
한 바퀴 산책으로 리투아니아다운 겨울 풍경을 일부분 본 것 같았다. 제대로 리투아니아의 겨울을 느끼려면 눈보라로 집에서 못 나오거나 영하 20도를 훨씬 밑도는 공기를 마셔봐야 한다고 하지만, 이미 그런 겨울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다시 자유로로 되돌아와 장도 볼 겸 아크로폴리스 몰로 들어갔다. 역시 요즘 겨울 주말은 쇼핑몰이 대세다. 유모차를 포함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쇼핑몰 안에서 따뜻하게 주말을 지내고 있었다. 여기도 공원에서 썰매를 타는 가족의 모습은 이제 소수가 되었고, 어린이들도 쇼핑몰에서 놀면서 겨울을 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