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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Apr 16. 2018

새해, 집으로 오는 길 to 카우나스

2018년 1월 12일

겨울방학에 한국에 나가면 가능한 한 오래 있다가 들어오려고 노력한다. 가족과 지인들을 만나다 보면 아무리 여유롭게 일정을 잡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특히 날씨도 한몫한다. 기온이 낮아도 해가 반짝 나는 날이 많은 한국의 겨울은 축복으로 느껴질 정도다. 리투아니아는 한국보다 위도가 높은 만큼 밤이 훨씬 길고, 겨울 내내 구름이 단단히 덮여서 해가 떴는지 졌는지 분간도 잘 되지 않았다. 이제 일상이 아니라 '휴가'가 된 한국에서의 연말연시는 매일매일이 이벤트 같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새해가 되어 리투아니아로 향하는 비행은 왠지 훨씬 먼 길을 떠나는 느낌이다. 다시 축축한 겨울로 돌아가느라 그런 것도 있지만, 실제로 더 오래 떠나는 길이기도 해서다. 여름방학은 6월 부터이지만 여러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한국에는 8월에나 몇 주 오게 되곤 했다. 8월에 서울에 다녀와 9월에 개강하면 연말까지 간격은 4개월 정도다. 그에 비해 1월에 다녀와서 2월에 개강을 하면 다시 8월에 갈 때까지 한국을 떠나 있는 간격이 거의 7개월에 가깝다.   

추운 1월의 겨울에도 인천공항은 구름 없이 화사한 하늘이었다.

인천 국제공항을 이륙하여 환승을 위해 핀란드 헬싱키에 내릴 때까지 따라온 햇빛과 헬싱키 상공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이별했다. 아시아와 가장 가까운 유럽의 관문이라고 선전하는 헬싱키부터 딱 유럽의 겨울이다. 반타 공항 위로 펼쳐진 두꺼운 구름은 겨울 햇빛 따위 절대 투과시키지 않겠다는 기세로 단번에 주변 색깔을 회색으로 바꿔버렸다. 한국에서 겨울에 휴가를 내어 발트나 북유럽에 여행 오는 관광객이었다면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기 시작할 시점이다. 이미 살고 있는 카우나스의 내 방, 내 일터로 돌아가는 길이니 더 이상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겨울 날씨는 이제 체념할 때도 되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잘 버텨보자"하는 다짐을 하며 헬싱키에서 몸과 정신을 모두 환승시켰다. 한국에서 실컷 본 햇빛, 푸른 하늘, 바위가 있는 높은 산, 햇빛에 빛나던 유리 코팅 고층 빌딩 등을 기억하면서 이 겨울이 끝날 때까지 활기를 이어가야 한다.

 

헬싱키에서 오후 3시부터 이미 저녁인 북유럽의 겨울을 내다보며 마음의 준비

헬싱키 공항에서 빌뉴스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는 핀에어 티켓이지만 더 작은 지역 항공사 'Norra'의 고속버스 같은 비행기를 쓰는 경우가 많다. 덩치 큰 승객도 많은데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작고 날씬하다. 음료 한 잔 외에는 먹을 것도 없다. 승객 수가 적어서인지 어쩌다 모든 승객이 일찍 다 타면 예정 시간보다 더 빨리 출발하기도 하고, 한두 명 기다리다 늦어지기도 한다. 추운 겨울날에는 비행기 동체의 얼음 제거를 이유로 지연되기도 한다. 겨울이 대체로 온화해진 데다 마침 눈도 비도 오지 않는 날이어서 고속버스 같은 꼬마 비행기도 정확히 예정된 시간에 출발하고 내렸다. 빌뉴스 공항은 드문드문 내린 눈을 밀어 치운 위에 비와 진눈깨비가 계속 겹쳐져 질척한 회색이었다.  


도착한 시간에도 마침 눈도 비도 안 오는 비교적 편안한 날씨가 이어졌다. 이것도 고마운 일이었으므로 바로 카우나스로 향했다. 어영부영 지체하다가 흐린 하늘에서 뭔가 내리기 시작하면 한국에서 반찬과 간식거리를 가득 채워 온 커다란 트렁크가 고문 기구로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버스나 기차나 소요시간과 가격은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기차가 좌석도 환경도 쾌적하다. 미리 봐 둔 시간표에 맞춰 기차로 빌뉴스 중앙역까지, 다시 카우나스 역까지 이동했다. 기차가 버스보다 안 좋은 유일한 단점은 버스에서는 기사 아저씨가 버스 짐칸에 트렁크를 실어주는 데 반해 기차는 내가 트렁크를 다 끌고 올라타야 한다는 점이다. 다행히 승객이 적어 한산했으므로 마주 보는 네 개 좌석을 다 차지하고 트렁크를 올려 앉혀서 카우나스로 향했다.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찍은 숙소 앞 보행로 모습. 전날 도착했을 때는 내 발자국과 내 트렁크 바퀴 자국만 찍히는 하얀 길이었다.

눈이나 비가 오고 있지 않으니 수월하리라 생각하며 카우나스 역을 나선 순간 난관이 닥쳤다. 카우나스 역에서 숙소에 이르는, 평소 15분 정도 걸리는 보도가 어제 내린 눈으로 깔끔하게 덮여, 트렁크 바퀴를 질질 끌어당겨야 했다. 바퀴가 제대로 구르지 않아서 힘이 몇 배로 들었다. 버스로 두 정거장 정도 되는 짧은 거리인데, 버스를 타 봤자 그 앞뒤로 걷는 수고는 비슷하다. 시내버스로 트렁크를 들어 올리고 내리는 작업도 귀찮아서 그냥 끌며 걸었다. 마치 모래사장에 가마니를 끄는 격이었다. 밟고 지나간 사람이 별로 없는 깨끗한 눈이 포근한 담요처럼 쌓인 것이었으나 무거운 트렁크를 질질 끄는 입장에서 눈 밟는 낭만이라곤 없었다. 중간에 건널목을 건널 때는 염화칼슘 분사로 회색 슬러시가 된 차도의 눈 위에서 트렁크 바퀴가 순식간에 삭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까지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다행히 두어 명 청년들이 도와주었다. 한겨울에 땀 뻘뻘 흘리며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헬스장에서 내다본 카우나스의 2017년 겨울과 2018년 겨울. 옛 건물 철거와 새 건물 신축으로 변화가 있지만 우울한 겨울빛은 한결같다.

한국 시간으로 아침 7시경에 부모님 집을 나서서 카우나스의 내 방에 들어서니 이곳 시간으로 밤 9시가 다 되었다. 7시간 시차를 계산하면 거의 21시간이다. 마지막 단계에 예상치 못한 눈길로 트렁크를 질질 끄는 고행을 하는 바람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아직 몸살 나지 않고 이런 여행도 하는 체력이구나 싶어 스스로 대견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엄마가 꼼꼼하게 포장해 주신 각종 반찬과 내 취향에 맞는 간식거리를 차곡차곡 정리하면서 기력을 회복했다. 봄이 올 때까지 어두운 겨울밤들을 함께할 식량이다. 2월에 개강을 해도 한참 계속될 겨울, 성탄절 시즌도 다 지나가서 반짝이는 거리 장식도 없다. 리투아니아의 겨울 분위기를 제대로 느껴볼 판인데, 긴 밤을 채워줄 각종 먹거리와 즐길 거리를 총동원해야 한다.  

동쪽 방향인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겨울풍경. 러시아인 학교와 공원이 바로 보인다. 겨울 내내 해 뜨는 게 보이는 날은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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