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26일
동지를 한 달쯤 앞둔 11월 말, 곧 성탄 시즌이 시작된다. 밤이 부쩍 길어져 4시가 넘으면 어두워지는 자유로의 가로등마다 성탄 장식이 걸렸다. 저녁이면 잔잔하게 불이 들어와서 따뜻한 분위기를 낸다. 서유럽 대도시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노란색과 은색 전구들이 내는 소박한 불빛이 정겹다. 크리스마스 장식 불빛이 우중충한 겨울을 밝혀준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반짝이 장식, 음악, 장터, 각종 공연이 모두 크리스마스를 기회로 삼아 연말의 긴 밤을 밝히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다른 계절에 있었거나 없었다면 긴 겨울을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독일의 유명한 크리스마스 마켓들에 비하면 리투아니아는 수도 빌뉴스의 마켓조차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소박하고도 센스 있는 장식과 불빛들은 밤이 끝없이 긴 12월 말의 성탄절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종강을 앞두고 조지아 식당에서 외국인 교수들을 위한 작은 파티가 있었다. 덕분에 조지아 음식을 제대로 경험했다. '그루지야'로 더 알려져 있는 조지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과 붙어 있는 흑해 연안의 나라다. 소련 치하의 경험을 공유해서 그런지 리투아니아와 인적 교류가 많다. 겉에서는 음식점 티가 잘 안 나는 오래된 주택에 식당이 있었다. 엄마가 조지아 사람이라는 집주인의 설명을 들으며 전통에 현대를 가미한 요리를 대접받았는다. 조금 특이하게 모두 채식이었는데, 조지아 음식이 채식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참가자 중에 채식주의자가 많았는지, 아니면 리투아니아에서 성탄절 절기에 가급적 고기류를 먹지 않는다는 걸 배려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에 돌돌 말은 호두, 견과류를 섞은 샐러드, 콩과 시금치를 견과류와 갈아 뭉친 경단, 호두가 많이 들어간 꿀 디저트까지 하나하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었다.
원래 조지아 음식은 양, 소, 돼지, 닭, 오리 등 고기를 많이 사용한다. 터키와 가까워서 꼬치구이도 유명하다. 좀 저렴하고 캐주얼한 분위기로 다른 조지아 식당이 자유로에 문을 열었는데 고기가 없는 메뉴가 드물었다. 피자와 닮은 폭신한 도우에 조지아 치즈와 각종 고기, 야채 토핑을 곁들이기도 하고, 구운 야채와 감자를 곁들인 구이나 스튜도 있다. 무엇보다 조지아는 와인이 깔끔하고 훌륭해서 고기 요리와 참 잘 어울린다. 단정한 채식 가정식을 경험한 부총장의 종강파티는 또 다른 고마운 경험이었다. 견과류가 많아 연말 분위기에도 잘 맞았지만, 갑자기 견과류를 너무 많이 섭취해서 배탈이 나는 경험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그쪽 지역 음식을 참 좋아한다. 괜찮은 조지아 식당을 알게 된 것은 겨울을 나는 데 큰 보탬이었다.
리투아니아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은 성탄절 이전 4주간을 고기와 우유를 먹지 않는 부분적 금식 기간으로 지킨다. 물론 젊은 세대일수록 성당도 안 가고 이런 규칙도 잘 지키지 않는다. 어른들 중에는 지키는 사람들이 꽤 많다. 성탄절 4주 전부터 고기류와 유제품을 먹지 않고 생선과 채소류로 먹는 전통이다. 평소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식습관을 생각할 때 결코 쉽지 않은 결심이고 그래서 '금식'으로 통한다. 이 기간 동안 독실한 신자들은 매일 있는 저녁 미사도 더 열심히 가면서 성탄절 이브까지 금식을 지킨다. 그만큼 성탄절 당일은 마음껏 많이 먹는다고 한다. 온 가족이 모이는 큰 명절이다. 신세대 대학생들도 성탄절 전날과 당일만큼은 꼭 가족과 함께 지낸다. 크리스마스이브 오후부터 당일까지는 거리가 적막하고 상점도 모두 닫는 게 리투아니아의 크리스마스 정경이라고 한다. 그래서 관광객들이나 나 같은 체류자에게는 미리 먹을 걸 사놓지 않으면 굶을 수도 있는 날이 크리스마스다.
금식도 하고 비교적 조용한 성탄 시즌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즐길 것은 최대한 즐긴다. 얼음 같은 비나 눈이 오락가락하는 긴 겨울밤에 거리 곳곳의 식당과 바에 앉아 술 한 잔씩 앞에 놓고 있다. 생각해보면 성탄절 금식은 술과는 상관이 없다. 리투아니아의 주류 소비량은 어마어마하다. 그 상당량이 겨울, 그리고 연말에 소비될 게 분명하다. 학생들이 많이 가는 그린카페, 베로 카페, 카페인 등 커피 전문 체인점들은 주류를 팔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식당, 바, 그리고 좀 오래된 카페 중에 식사가 될 만한 메뉴를 파는 곳들은 대부분 주류를 취급한다. 종류도 다양한데, 의외로 보드카나 위스키 같은 독주보다는 맥주나 와인을 많이 마신다.
주류 전문 바가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식당에서 마실 거리 메뉴판을 따로 준다. 술 종류가 다양해서 상당히 길다. 맥주만 고르려 해도 한참 들여다봐야 한다. 독일이나 벨기에 맥주도 팔지만, 생맥주는 대부분 리투아니아 맥주다. 두세 가지 대중적인 상표가 있고, 중소규모로 특화된 맥주들도 있다. 가장 흔히 마시는 상표는 1784년부터라고 쓰여있는 Svyturys이다. 맑은 라거(Ekstra), 필스너 같은 하얀 맥주(Baltas), 흑맥주도 있는데 맑은 맥주를 많이 마신다. 카우나스에 공장이 있는 Volfas Engelman 브랜드는 한국에도 진출했다. 와인은 그야말로 온 유럽과 구소련 상표가 총동원되어 종류가 어마어마하다. 리투아니아는 날씨 때문에 포도 와인은 생산되지 않고 사과나 딸기류 와인이 조금 있다. 그런 리투아니아 와인(과일주)은 고급화되어 오히려 비싸다. 마트나 주류 특별 매대에서 찾을 수 있다.
식사할 때도 맥주나 와인을 많이 마시고, 식사를 하지 않으면 한 잔 마시면서 간단한 안주거리를 시켜 긴긴 겨울밤을 보낸다. 안주의 진리는 물론 튀김이다. 감자튀김만 떠올릴지 모르나, 리투아니아에서는 기본적인 안주가 바로 빵 튀김이다. 빵 튀김이야말로 가장 사랑받는 맥주 안주다. 단단한 잡곡빵을 스틱 모양으로 잘라 감자튀김처럼 튀긴 것이다. 짭짤하게 만든 치즈 소스를 찍어먹는데, 따뜻할 때 먹으면 기름이 흥건하고 짭짤한 것이 맥주 안주로는 정말 맛있다. 칼로리를 알면 몸뿐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 해칠 듯한 느끼함이 충만한 음식인데도 계속 손이 가는 무시무시한 안주다. 웬만한 음식점이나 바에서 다 파는 메뉴이고 양념이 조금씩 다르다. 중국집에서도 파는데 향신료를 넣어서 튀기기도 한다.
독일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따뜻한 와인도 판다. 독일에서 글뤼바인(Glühwein)이라고 부르는 따뜻한 와인은 일반 와인에 계피나 오렌지, 각종 향신료를 넣어 중탕해서 만든다. 성탄절 음료라도 해도 무방할 만큼 크리스마스 마켓의 기본 음료다. 리투아니아에서는 그냥 '핫와인'으로 통한다. 파는 곳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향신료를 넣지 않고 그냥 데운 와인에 가깝다. 그래도 춥고 축축한 날씨에 거리를 걷다가 카페나 식당에서 만나는 핫와인 한 잔은 큰 위로가 된다. 성탄 시즌 시작 즈음부터 식당과 카페, 바에서 핫와인을 개시한다. 겨울 첫 핫와인을 홀짝거리고 있자니 안개와 안개비와 찬바람으로 움츠러든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독일과 북유럽에서는 술보다는 감기 예방 음료로 많이 만들어두고 먹는다는데, 우울한 날씨가 계속되는 겨울을 나기 위한 에너지 음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