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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28. 2018

해날 때 산책은 필수

2017년 11월 19일

가을에 비가 많이 오기 시작하고, 겨울로 접어들수록 비가 더욱 많이 오다가 진눈깨비고, 눈으로 바뀐다. 리투아니아의 겨울 온도는 일교차가 별로 없다. 아침 기온이 영상 2~3도로 영하의 추위가 아니라고 해도, 낮에 더 올라가지 않고 그 기온이 하루 종일 비슷하다. 그래서 낮이 더 춥게 느껴진다. 아침 8시가 넘어야 서서히 밝아오는 늦은 아침에 비까지 내리면 어지간한 일 아니면 나갈 생각이 사라진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진눈깨비나 눈이 안 오는 날이 드물다. 맑은 날은 그야말로 소중하다. 오랜만에 햇빛이 나면 온 세상의 색깔과 표정이 한꺼번에 변해서 기분은 물론이고 호흡 속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오늘 해가 나는지, 몇 시부터 나는지 항상 날씨 애플리케이션을 실시간 체크하고 산책 여부를 결정한다. 앱 예보는 실시간 중계에 가깝지만, 해가 날 때를 놓치지 않도록 신경 써서 본다. 주중 내내 비 표시가 있다면 기대 수준을 낮춰서 잠시라고 그칠 때를 틈타 산책을 나갔다. 

소보라스(성 미카엘 성당)는 자유로 산책의 시작점이다.  

카우나스 구시가 방향으로 산책하는 길은 강변 길이 아니면 자유로다. 둘 다 구시가지 광장으로 수렴한다. 광장을 지나 두물머리 공원까지 더 도는 것은 선택 사항인데, 공원까지 돌아서 왕복을 하면 1만 보가 조금 넘는다. 바람이 불거나 흐린 날은 강변보다 덜 추운 자유로를 걷는 쪽을 선택한다. 높게 자란 나무가 두 줄로 서 있고, 리모델링을 거쳐 예뻐진 가게들이 들어서는 자유로는 한국에 있었더라도 '걷고 싶은 길'이었을 것이다. 자유로 시작점에 해당하는 소보라스(정식 명칭은 성 미카엘 성당)가 숙소 근처여서 산책도 거기서 시작한다. 구시가지까지 이어지는 보행자 전용 직선 길은 날씨 좋은 주말이면 햇살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활기가 돈다. 바이올린 켜는 할머니가 있을 때도 있고, 흥겨운 집시풍 노래를 연주하는 아저씨들도 있다. 유모차를 밀거나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을 이끌어가며 움직이는 가족들이 많다. 

자유로와 구시가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서점이 건재하다.

자유로 길가는 대부분 상점, 식당, 카페이고 호텔과 관공서가 끼어 있다. 서점은 서너 군데 보이는데, 영어책은 드물어서 들어갈 일은 별로 없다. 관광 안내서 정도가 영어일 뿐 영어 소설도 거의 없고 인문, 사회, 역사책은 기대하기 어렵다. 빌뉴스 대학 서점에서 겨우 영어로 된 리투아니아 역사책을 하나 살 수 있었다. 선택의 폭이 넓지는 않지만 그나마 빌뉴스가 외국인을 많아서 영어책을 구비하고 있었다. 카우나스의 자유로 서점에서 살 만한 것은 문구나 달력, 수첩 등이고, 구시가 중간쯤 나오는 후마니타스(Humanitas) 서점에서 소책자 형식의 영문 가이드북을 산 정도였다. 

구시가 광장은 갈 때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계절과 날씨 때문에 같은 길이라도 걸을 때마다 색깔이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같은 길이건만 때마다 다른 느낌을 담느라 비슷한 스마트폰 사진을 계속 찍곤 했다. 주말에 구시청사와 주교좌성당이 있는 구시가지 광장에 이르면 항상 뭔가 행사가 있다. 성탄 시즌이 되면 이 광장에 트리와 마켓이 들어선다. 


구시가지 광장 진입로 코너에는 작은 사진 갤러리가 있다. 사실 잘 찾아보면 골목에 작은 갤러리들이 꽤 많다. 입장료도 없고 홍보가 적극적이지도 않은데 전시회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게 신기했다. 사진 갤러리에서는 초겨울 두어 달 동안 Adauktas Marcinkeviciaus라는 긴 이름의 작가가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1936년에 태어나 1960년에 사망한 작가였다. 겨우 24년 짧은 인생을 리투아니아의 가장 비참했던 시기에 살았다. 사진예술이 제대로 자리잡지도 않았던 시기인데 이 젊은 작가는 몇 개 없는 작은 필름 카메라로 소련 치하의 리투아니아 사람들을 찍었다. 특히 1955년에서 1959년까지 카우나스에서 찍은 사진을 전시하고 있었다. 24살이면 너무 요절했는데, 리투아니아 사진 예술사에서 자취가 크다고 한다.  

광장 진입로 변의 작은 사진갤러리
사진 갤러리에서 만난 1950년대 젊은 작가의 시선

사진전에는 소련 치하였던 당시 카우나스 수력발전소 건설현장 사진이 많았다. 현장 자체보다는 그곳에서 일하던 리투아니아 젊은이들의 표정을 담았다. 노동자도 있고 구경꾼도 있고, 학생캠프 사진도 있다. 학생캠프라고 하지만 영락없는 노동력 동원 캠페인이었다. 힘든 노동이었고 정치적으로 억눌린 상황이지만 일상을 즐기려는 웃는 얼굴을 포착한 사진들이었다. 부제가 '긍정과 회의'였는데 마냥 밝지도 않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고, 딱히 저항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순응적이지도 않은 얼굴들이다. 작가의 시각이 그러했을 것이다. 얼핏 그 시절에 사진이 잘 나오려면 자연광이 중요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햇살이 좋은 날 주로 찍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간만의 햇살로 인해 다들 밝은 표정인 게 당연할 수도 있다. 

밤이 긴 겨울, 산책하다 조금만 지체하면 깜깜해진다.

사진 갤러리를 잠깐 들르고 나오니 어느새 해는 넘어가고 안개비가 뿌리는 저녁 빛깔이다. 구시가지에는 기념품 가게도 꽤 있어서 산책길에 조금씩 구입하기도 한다. 부피가 작은 나무칼이나 소품은 한국에 가져갈 선물용으로 요긴하다. 가게마다 다르지만 잘 고르면 결이 부드럽고 잘 쥐어지는 버터 칼을 득템한다. 린넨 가게에서 테두리에 털이 달린 데님 색깔의 린넨 모자도 샀다. 한국에서는 겨울이라도 따로 모자를 쓰는 경우가 많지 않다. 여기는 거리를 다니는 모두에게 모자가 필수품이었다. 습한 겨울이라 그런지 머리통이 시리다는 느낌을 알 것도 같다. 

본격적인 겨울 날씨는 점점 늦게 오는 추세라더니, 강변은 11월 말에도 가을 분위기다.

최근 몇 년간 본격적인 겨울은 점점 늦게 온다고들 했다. 11월인데 아직 눈이 안 오는 게 신기하다는 뜻이다. 아직 눈보다는 비가 오다 보니 초겨울보다는 늦가을 색깔이다. 자유로 거리는 회색이 되어서 겨울 같은데 강변 산책로는 가을 느낌이 남아있었다. 네무나스 강변 길을 산책길로 잡으면 잘기리스 농구장이 있는 섬을 마주 보며 구시가지까지 따라가서 자연스럽게 두물머리 공원으로 이어졌다. 주중 낮시간에도 날씨가 개어서 하늘이 보인다 싶으면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나가서 걸었다. 햇빛이 비친다면 꼭 나가야 한다. 직접적인 수업 시간만 아니면 자리에 매이지 않는 객원교수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해가 나더라도 강변은 바람이 세기 때문에 옷은 단단히 입어야 한다. 바람을 맞아서 빨개지더라도 햇볕을 쪼이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사람도 광합성이 필요하다는 농담은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다.

 

긴 겨울 중에 해가 비치고 하늘이 파랗기까지 한 날은 실내에 있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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