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22일
연말연시는 반드시 한국 집에 다녀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가족과 함께 연말을 보낸다는 의미가 첫 번째지만, 리투아니아의 축축한 긴 겨울을 잠깐 벗어나는 의미도 컸다. 칼바람에 건조할지언정 햇빛이 쨍한 한국의 겨울로 기분전환을 하고 싶었다. 성탄절까지는 축제 분위기라도 있지만, 이후 연말과 1월의 방학 내내 진눈깨비 내리는 기나긴 밤들을 혼자 참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도심의 기숙사 문 앞에서 서울 부모님 아파트 문 앞까지는 거의 20시간이 걸린다.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카우나스 기차역으로 간다. 기차로 빌뉴스로 이동한 후 빌뉴스 기차역에서 바로 공항으로 이동하면 최소 2시간이 걸린다. 빌뉴스에서 인천까지 직항은 없다. 한 번 경유하는 노선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폴란드 바르샤바, 러시아 모스크바, 독일 프랑크푸르트, 그리고 핀란드 헬싱키 네 곳 정도다. 항공 노선이 가장 짧고 공항 대기시간도 짧아서 애용하게 된 핀란드의 핀에어(Finnair)로 빌뉴스를 떠나 헬싱키까지 한 시간 반 비행한다. 헬싱키 공항에서 두세 시간 대기 후에 인천행 비행기를 타면 8~9시간 정도 걸려 인천에 내린다. 도착하면 한국 시간으로 다음 날 오전 9시 전후이고, 공항을 빠져나와 서울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집 앞에 이르면 점심 나절이다.
만만치 않은 여행이지만 연말연시를 보내러 집으로 가는 길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 되었다. 물론 교통편에 변수가 많이 생긴다. 기차나 비행기 운항에 차질은 없는지 계속 확인해야 하고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눈이 많이 오거나 안개가 심하거나 바람이 세면 비행기 지연이나 취소도 드물지 않다. 아무 문제없이 효율적으로 잘 연결될 경우가 20시간이다. 몇 번 오가면서 교통편에 익숙해지고 체력과 시간 소모가 가장 적은 방법을 알게 되어서 그나마 24시간 이내가 된 거다. 처음 서울에 갈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루 전에 미리 빌뉴스에 가서 공항 바로 앞에 있는 호텔에 숙박을 했었다. 라이언에어나 위즈에어 같은 저가항공이 많이 취항하는 빌뉴스 공항은 밤늦게 도착하거나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 편이 많다. 그래서 공항 바로 앞에 호텔이 꼭 필요하다. 저가항공은 정말 싸지만, 그거 타려다 결국 이런 호텔 숙박비를 더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초행길에 걱정을 덜고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공항 근처 쇼핑몰이나 빌뉴스 시내에 나가서 선물 쇼핑을 할 시간을 벌기도 한다. 핀에어는 저가항공은 아니어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시간대에 편성되어 있다. 초행의 긴장을 면한 후에는 웬만하면 호텔 숙박은 하지 않게 되었다.
서울을 향할 때는 짐은 별로 없지만 일부터 큰 트렁크를 들고 간다. 가족과 지인들 선물로 어느 정도 채워지기는 하지만 내 짐은 최소한으로만 싸서 여유를 둔다. 돌아올 때 각종 밑반찬이며 라면, 과자, 간식거리를 잔뜩 넣어 와야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로 이어지는 휴가철이라 기차나 공항도 평소보다 사람이 많다. 피곤하면서도 기대감이 어린 얼굴들이다. 인터넷 사전 체크인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카운터에서는 짐만 부치고 바로 보안검색 통과다. 작은 공항이라 몇 걸음 걸을 필요도 없이 일사천리로 끝난다. 면세점도 별로 없어서 그저 기다리는 일뿐이다. 출국 심사는 EU를 완전히 떠나는 헬싱키 공항에서 하기 때문에, 빌뉴스 공항은 국내선을 타는 지방공항 같다. 반면 헬싱키의 반타 공항은 아시아 곳곳에서 경유 편이 많이 드나드는 꽤 큰 공항이라 면세점도 크고 먹을 곳도 많다. 중국 관광객이 급증하면서 헬싱키 공항 면세점에도 중국계 직원을 꼭 채용한다. 구경 좀 하고 있으면 중국 직원이 중국어로 말을 걸어온다.
한국에서 처음 리투아니아에 올 때는 이곳에서의 체류가 회복과 충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쫓기는 듯 바쁜 한국의 일상에 비하면 너무나 여유롭고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종강을 하고 연말에 한국을 향해 출발하려니 어느새 이곳의 생활이 일상이 되고 한국 행이 휴가가 되었다. 지치고 바쁜 일상에서 탈피하는 휴가가 아니라 어둡고 축축한 겨울로부터 탈피하는 휴가다. 한국의 겨울도 기온은 만만치 않게 낮지만 적어도 해는 쨍쨍하다. 이상 기후로 리투아니아의 겨울이 해마다 따뜻해지고 있어서 기온만 따지면 오히려 서울이 더 추운 날도 많다. 기온보다는 햇빛 여부가 중요하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애매한 영상 기온에 줄곧 안개비, 그냥 비, 진눈깨비가 번갈아 내리는 발트의 컴컴한 겨울은 사람에게도 겨울잠이 있기를 바라게 만든다.
빌뉴스에서 이륙하기 전, 두꺼운 구름을 뚫고 올라가 만나는 푸른 하늘과 햇빛을 기대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햇빛이 반가워서 비행기 차창으로 잘 찍히지도 않는 핸드폰 사진을 찍어대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빌뉴스에서 헬싱키로 가는 항공편은 정말 조그마한, 날아가는 고속버스에 가까운 비행기다. 창문도 띄엄띄엄하고 작아서 창가 자리에 앉아도 밖을 못 보는 사태도 생긴다. 그래도 하늘을 보겠다고 언제나 창가 자리를 선택했다. 헬싱키에서 서울 가는 길은 내내 밤을 통과하는데, 석양과 일출을 곁눈질로 보겠다고 또 굳이 창가에 앉는다. 한밤중에 북극을 통과할 때는 작은 비행기 창문으로도 꽤 많은 별들을 볼 수 있다. 구름이 많은 겨울 날씨에 별이 총총한 하늘은 비행기를 타야만 볼 수 있는 귀한 구경이다. 비행기 좌석 스크린에 나오는 영화보다도 그 별 가득한 밤하늘이 더 흥미롭다. 작은 창에 얼굴을 딱 붙이고 하늘 구경을 하며 서울로,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