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8일
추울수록 날이 맑다는 규칙은 한국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겨우내 리투아니아는 춥고 안 춥고를 떠나 무조건 흐리고 축축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봄이 오는 표시일 수도 있지만, 2월 들어 리투아니아에서도 그런 날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2월에 기온이 1월보다 더 떨어진다는 것 자체는 좀 이상한 현상이기는 하다. 그래도 낮이 조금 길어지면서 햇살이 비치는 시간이 잦아졌다. 기온이 좀 높은 날(예년 2월 기온인 날)은 원래 리투아니아 답게 흐리거나 비가 오고, 영하로 뚝 떨어지면서 더 추운 날이면 좀 맑아져서 햇살이 비치는 식이다. 문제는 그 추우면서 맑은 날에 햇살을 즐기러 나가기에는 칼바람이 쌩쌩 불어 좀 많이 춥다는 거였다. 푸른 하늘을 보려면 영하 10도 정도는 감당하라는 듯, 그리 오래 햇빛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면서 공기와 바람이 정말 차가웠다.
비나 눈이 추적추적 내리는 영하 1도 보다는 간간이라도 해가 나오는 영하 10도가 낫다-라고 생각하지만, 간혹 센 바람이라도 맞으면 문자 그대로 '얼굴이 찢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무 추워서 결국 산책마저 포기하고 방에서 창문을 통해 맑은 날씨를 구경만 하는 날도 생겼다. 본의 아니게 카페나 식당에서 돈을 쓰지 않아 절약이 되는 효과도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추위에 대한 불평은 나보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더하다는 거였다. 나만 이곳 날씨에 익숙하지 않아서 더 춥게 느끼는 거고, 현지인들은 익숙해서 다 적응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결코 그게 아니었다. 물론 개인마다 다르지만, 기온이 좀 올라가서 한국이라면 얇은 코트만 입어도 되겠다 싶은 날조차 많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너무 춥다고 괴로워하고 옷도 더 열심히 껴입는다. 모자도 쓰고 목도리도 두르고, 움츠리고 찡그리고 투덜대는 것도 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다.
수업만 하고 곧바로 숙소로 직행하기를 며칠 째, 그래도 귀한 햇볕이 쨍쨍한데 좀 춥더라도 햇볕 쬐면서 걸어보자 싶어 산책 코스로 방향을 틀어 보았다. 몇 분 걷다가 칼바람을 얻어맞고 곧바로 후회막심이다. 아예 수업 나올 때 모자와 장갑까지 챙겨 칼바람을 뚫기 위한 무장을 했다. 햇살 좋은 오후, 낮에도 영하 10도에 육박했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구시가까지 걸었다. 햇빛 받은 구시가 경치는 칼바람에 맞선 용기에 보상을 해준다. 공기와 바람이 아직 칼 같아도 햇빛만 있으면 봄은 반드시 온다고 외치기라도 하듯, 강변과 공원은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영하 3~4도 정도로 비교적 온화(?)하면서 해가 나는 날은 고맙기가 그지없었다. 아직 자유로나 공원에 사람들은 뜸하지만 간혹 나처럼 일부러 나와서 비장하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북극 같은 공기와 바람 때문에 아직은 봄은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햇빛에 의지해서 봄이 올 준비는 하는 모양이었다. 설령 햇빛이 밝지 않고 구름이 금방 몰려와서 겨우 내내 본 것과 별 차이 없는 우중충한 색깔이 되어도, 이제 자유로를 걸으면 조금씩 달라지는 거리 표정이 보였다. 자연 상태에 가까운 강변이나 두물머리 공원의 색깔과 표정은 더 확연히 다르다. 텅 비어있는 것 같던 한겨울과 달리 새들이 늘어났고, 얼음은 깨지고 있으며, 나무는 아직 앙상하지만 둥치에 물이 오르는 듯 생기가 돌았다. 수십 년간 같은 길로 동네 산책을 다녔다는 어르신들을 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물론 이왕이면 같은 길보다는 새로운 길을 만나는 것이 훨씬 좋지만, 같은 길에서 조금씩 변하는 색깔과 표정을 확인하는 것도 일상의 행복 요인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카우나스 중앙의 자유로는 단순하게 뻗어 있으면서도 그런 변화의 재미를 주는 산책로이다. 중심가인데 보행자 전용이고, 조경이 잘 된 직선 가로수길 양쪽으로 카페와 식당이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구시가지로 이어지면서 근대에서 중세로 시대가 겹쳐 분위기가 바뀐다. 재개발 사업 때문에 고치는 건물이 많아서 늘 어딘가 공사 중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새 단장을 마치고 나면 예쁜 가게도 늘어난다. 대학이 모여 있으니 학생들의 활기도 계절을 따라 흐른다. 곧 다가오는 밸런타인데이를 내세워 초콜릿과 사탕, 꽃을 많이 팔고 있는데, 아직 그리 불티나게 팔리는 눈치는 아니다. 여기 밸런타인데이는 남녀 구별 없이 서로 연인에게 선물을 한다는데 그리 의무적이지는 않다. 대부분은 남자 친구들이 여자 친구에게 꽃을 선물하고 데이트를 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맑고 조금 기온이 높은 날은 꼭 공원까지 산책을 했다. 자유로를 따라 구시가 끝까지 가서 성채에 눈도장을 찍고 두물머리 공원을 완전히 돌아서 되돌아오면 1만 보가 좀 넘는 산책이다. 맑은 날은 카우나스 성채의 붉은 벽돌도 파란 하늘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산책을 응원해 주었다. 거기에 힘을 얻어서 돌아오는 길을 자유로가 아닌 강변을 선택하곤 했다. 맑은 날은 강물이 빛나면서 탁 트인 경치가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2월은 아직 겨울인지라, 안쪽의 거리보다 훨씬 센 강가의 찬바람에 금방 오그라든다. '봄이 왔다'라고 느낄 수 있는 시점이 정해져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강변을 걸었을 때 꽁꽁 어는 느낌은 없어져야 봄이다. 햇빛에 속아 봄을 느끼러 나왔다가도 아직은 고집 센 겨울을 맛본다. 리투아니아 어로 3월을 코보(Kovo)라고 하는데, 싸운다는 뜻이라고 한다. 2월은 아직 봄과 겨울의 싸움이 붙지도 않은 시점이니 착각하면 안 된다. 겨울과 봄이 싸우는 3월이 빨리 오고, 이왕이면 봄이 빨리 승리해 주기를 모두가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