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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Apr 30. 2018

겨울의 끝을 바라는 팬케이크 데이

2018년 2월 28일

2월의 마지막 날은 딱히 특별한 날은 아니지만, '팬케이크 데이'라면서 아우렐리우스 교수가 집에서 구운 담백한 쿠키를 나눠주었다. 겨울이 드디어 끝난다는 의미로 서로 축하하면서 쿠키나 팬케이크 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실제로 겨울이 끝났다기보다는 겨울이 제발 끝나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나누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공휴일도 아니고 평일이었지만, 수업시간에 물어보니 학생들도 다 아는 나름대로 전통 있는 날이었다. 사계절을 산술적으로 나누면 겨울은 12, 1, 2월이니 2월의 마지막 날에 겨울의 끝을 축하하는 것이 맞기는 하다. 실제 날씨가 그렇게만 된다면 한국처럼 3월이 초봄이 되고, 좀 추워도 꽃샘추위로 치부하면서 조금만 더 참자고 다독이게 될 법하다. 

봄맞이는 아직이라는 듯 한파와 함께 눈이 쌓인 2월 말 어느 날, 농구장 잘기리스 아레나 앞 풍경

실상은 2월 말에 이제야 겨울의 제맛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수은주가 영하 20도에 육박하고 있었다. 해마다 날씨 변화가 너무 달라서 예측불가라지만, 2018년의 2월 말은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놀랄 만큼 추웠다. 이때 한국도 춥기는 했다. 2월 초순과 중순에 한국이 기록적인 한파를 기록했는데 2월 말에 그 차가운 공기가 유럽 쪽으로 넘어온 것 같았다. 온난화 때문에 북극이 녹으면서 찬 공기가 오히려 남쪽으로 빠져나오고 막상 북극은 이례적으로 따뜻하다는 게 뉴스에 나온 해석이다. 한국도 유럽도 온난화 때문에 때아닌 북극한파를 맞은 셈이다. 리투아니아 사람들도 당황스러워했다. 1월보다 추운 2월, 2월 초보다 훨씬 추운 2월 말을 경험한 특이한 늦겨울이 되었다. 그래도 발트지역은 유럽 내에서는 변덕스러운 겨울 날씨에 익숙한 지역이라 사회적인 혼란은 없었다. 뉴스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남유럽에 닥친 수십 년만의 저온과 폭설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쪽은 추위나 눈에 대한 대책이 필요 없던 곳들이었으니 혼란과 피해도 상당한 모양이었다.

기온이 낮으니 하늘은 비교적 맑아서 밤하늘에 달과 별도 더 자주 보였다.

1월에는 비로 축축하던 길이 2월 말에 드디어 꽁꽁 얼어붙었다. 미끄러운 눈과 얼음 때문에 한겨울 부츠를 벗을 수가 없었다. 리투아니아는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휴교하게 되어있다. 최근 몇 년간 그렇게 낮은 기온이 없었기에 휴교도 없었다. 간만의 한파에 아우렐리우스 교수의 두 딸은 기온을 열심히 확인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영하 19도를 찍고는 더 이상 내려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대학교는 해당 사항이 없어서 20도가 되든 말든 가장 두꺼운 것들로 무장하고 미끄러운 길을 뒤뚱거리며 다녔다. 기온이 파격적으로 낮아지고 바람이 부니 오히려 하늘은 좀 밝아졌고 파란색도 더 자주 보였다. 그 햇빛이 빨리 강해져서 한파를 몰아내고 진짜 봄이 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2월 말이 되었다. 

첫겨울이었던 2017년 말~18년 초에는 북극 한파가 넘어오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2월 말이 제법 봄 같았다. 기온이 온화했던 만큼 부슬비가 내리는 흐린 날이 더 많기는 했지만 간혹 개일 때마다 산책하기도 좋고 봄이 오는 모습을 구경하는 재미가 더 있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도 봄의 특징이라며 호기롭게 산책하다가 비바람에 난감해지기도 했었다. 어느새 비바람에 추워졌을 때 생각나는 메뉴가 갈비탕이나 설렁탕이 아니라 리투아니아 감자전(감자 팬케이크)과 고기 수프가 되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하기 나름이다. 감자전을 먹으러 가서 그나마 조금 배운 리투아니아어로 메뉴를 읽을 수도 있게 되었다. 작게 영어로도 적어 놓는데, 이제 감자나 고기 종류는 리투아니아어로 구별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뿌듯하다. 겨울 동안 날씨에 기분을 의존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매우 위험하다는 것도 절감했다. 가능하면 날씨에 상관없이 운동이나 장보기 같은 일상은 똑같이 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도 날씨 앱에 해가 날 거라는 표시만 뜨면 눈 만난 강아지처럼 흥분하면서 산책 준비를 한다. 이것도 여기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달력은 넘어가고, 팬케이크나 쿠키를 챙겨 먹으며 봄을 기대하는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정겹다. 한파 때문에 더 간절해져서 봄에 대한 기대감이 배가되는 것 같았다. 한국은 겨울에 기온이 낮더라도 해가 쨍쨍하고 밝아서, 실내에서 일하다 보면 봄이 오는 과정을 보기 어렵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봄이 오는 과정이 진짜 눈으로 보인다. 피부에 닿는 기온이나 바람으로 봄기운을 느끼는 게 아니고, 주변의 색깔과 질감이 변해가는 과정을 눈으로 보는 거다. 어차피 기온은 변덕스러워서 두꺼운 겨울옷을 4월, 5월, 거의 여름 직전까지 입어야 한다. 옷은 겨울이라도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져 간다. 서서히 없어지는 눈과 얼음, 티 나게 길어지는 낮과 짧아지는 밤이 보이고 풀과 나무들이 생기를 품는 것이 보인다. 영하 20도는 좀 심하지만 어쨌든 기온이 낮아도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봄의 흔적들을 환영하면서 3월을 맞았다. 3월 동안 봄이 겨울을 이겨서 계절을 당기고 화창한 여름을 늘려 주기를 기대한다.

작년 이맘때, 변덕스러운 날씨 가운데 봄기운이 퍼져 가던 강변과 두물머리 공원
봄이 되면 백조도 날아들고 물이 불어나서 공원 가장자리가 잠긴다. 작년에는 2월 말에 이 모습이었지만 올해는 한파로 어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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