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9일
4월 1일 부활절에 만우절 거짓말처럼 눈이 내렸다. 아직도 겨울이란 말인가, 눈으로 보면서도 이게 거짓말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금세 녹는 눈이었지만, 그 후로도 계속 차가운 바람 때문에 코트와 패딩을 여며야 했다. 그런데 4월 마지막 주말, 거리 풍경은 갑자기 여름이 되었다. 역시나 예측 불가인 날씨 변화, 이게 바로 리투아니아 봄 날씨라고 푸념한다. 분명 4월 초순을 지나 중순까지도 겨울 느낌이었다. 겨울 끝자락에 감기 걸리면 억울할 것 같아 옷깃을 잘 여미고 우산을 들고 다니며 4월을 보냈다. 그 4월의 마지막 주에 갑자기 여름으로 치달은 거다. 여기서 영상 20도가 넘는 맑은 날씨는 완연한 여름 날씨다. 옷장을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기 전에 여름 햇볕이 쏟아졌다. 습관적으로 코트에 포근한 옷차림으로 나갔다가 콧잔등의 땀을 몰래 닦고 있자니 주위로 민소매와 반바지 입은 학생들이 지나갔다.
4월 봄 날씨는 그야말로 변화무쌍이었다. 시각적으로 봄이 기세를 펴는 과정이 보였던 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들쑥날쑥하고 일보 전진을 위한 이삼보 후퇴가 너무 잦았다. 전반적으로는 해가 나는 푸른 하늘이 늘어나면서 눈이 사라진 땅에 초록빛이 퍼지고 봄 도착을 선전했다. 나무마다 연둣빛 물이 오르더니 작은 연두색 잎이 피기 시작했다.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칼바람은 덜해져서 스마트폰을 쥔 손이 주머니에 밖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하루 이틀은 선글라스가 필요할 정도로 찬란한 햇살이 비치다가, 다음 날은 또다시 차가워지면서 얼음 알갱이에 가까운 비가 오기도 했다. 봄인 줄 알았느냐며 놀리는 것 같은 부슬비 뿌리는 길 때문에 두꺼운 신발을 치우지도 못했다. 봄이 오긴 온 것이냐는 내 질문에 다들 그저 웃었다. 봄은 항상 기다리는 대상일 뿐 오지 않는다, 5월에 라일락 향기가 퍼져야 온 것이다, 봄이 왔나 싶으면 여름을 지나 다시 가을이다 등등 의견도 분분했다.
4월 하순으로 접어든 주말에 빌뉴스를 방문했을 때, 센 바람도 겨울보다는 봄기운을 머금고 있음을 느꼈다. 4월마다 개최하고 있는 '발트 지역 한국어 교육 세미나'에 참석차 빌뉴스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덕분에 봄 밤의 빌뉴스 야경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저녁 9시 가까이 되면서 어두워진 빌뉴스의 초봄 야경은 맑은 하늘 덕에 푸른빛을 띠었다. 푸르다가 보라색이 된 밤하늘 아래 노란 가로등 불빛이 비쳐서 왠지 낭만적이었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움츠러들기는 했지만 이제 겨울은 다 갔다는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다음 날부터 갑자기 따뜻한 봄날이 되었다. 급진전하여 여름빛에 눈이 부시기 시작했다. 봄볕이지만 구름 없는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볕은 꽤 강렬했다. 겨우내 해를 못 봐서 피부가 민감하게 반응했는지 더 따갑기도 했다. 세미나 참석자 중에 발트 가장 북쪽 에스토니아의 탈린에서 온 선생님들은 이렇게 좋은 여름 날씨냐며 감동해마지 않았다. 탈린이 북쪽이라지만 워낙 가깝고 작은 나라들이라 객관적으로 큰 차이는 없을 터다. 하지만 모두가 봄을 간절히 바라던 중이었으므로, 약간의 온도 차이와 햇살은 빌뉴스를 마치 지중해 휴양도시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맘때 빌뉴스와 카우나스 곳곳에 체인점이 있는 카페인(Caffeine)에서 난데없이 '체리블라썸 카푸치노'를 팔았다. 벚꽃이라고는 일본에서 친선 명목으로 선물한 몇 그루가 있는 곳을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나라다. 혹시 여기서 '체리 블라썸'은 다른 꽃을 지칭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분홍색 벚꽃 카푸치노가 4월 시즌 음료로 걸려있었다. 벚꽃 비슷한 흰색의 꽃나무들이 4월 말쯤에 일제히 피기는 했다. 나름대로 매력적인 봄 음료 마케팅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한국 스타벅스의 '체리블라썸 라테'처럼 분홍색 초콜릿을 섞은 음료였는데, 흥미로워서 한 번 먹었다가 매우 후회하여 다시 시도하지는 않았다.
3월 말의 춘분을 지나면 6월 말의 하지까지 한 달에 한 시간씩 일출이 빨라지고 그만큼 일몰이 느려진다. 4월은 낮과 밤 길이의 변화가 가장 잘 느껴지는 달이다. 춘분을 지나면서 서머타임을 시작하기 때문에 한 시간을 앞당긴다. 그러면 4월 초에는 7시쯤 해가 뜬다. 하지만 4월 어느 즈음부터 6시도 되기 전에 동향 창으로 직사광선이 들어와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5월부터는 새벽 5시부터 해가 떠버려, 수면 패턴과 일출 일몰을 맞추기가 불가능해진다. 분명 5월에도 눈발이 날린 적이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여름 날씨와 화창한 하늘을 쉽게 믿을 수는 없다. 날씨 앱에는 당분간 지중해 날씨처럼 매일 둥그런 해와 20도 넘는 기온이 예보되어 있었다. 5월은 진정한 계절의 여왕 면모를 보여주려는 것인가, 그게 진짜라면 정말 행복한 봄이 될 것 같았다. 5월에 20도를 넘나들며 여름 같다가 6월에 다시 비 오고 추워진 적도 있다는 두려운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어른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 황금 같은 날씨를 더욱 열심히 즐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