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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Nov 17. 2019

마무리, 어느 여름날의 마지막 산책

2018년 8월 22일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날, 늦여름의 카우나스는 눈이 부셨다. 

2년차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다니러 갔다가, 8월 초에 갑작스럽게 이직을 결정하게 되었다. 계속될 줄 알았던 리투아니아 생활을 접고 급히 한국 귀국을 준비해야 했다. 강의 계획을 다 세워놓았던 VMU 동아시아학부에 양해를 구하고, 방을 정리하고 짐을 싸서 보내고, 각종 행정적인 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점점 가까워져 가던 사람들과 갑자기 헤어지게 된 것, 함께 벌려 놓은 일을 못하고 빠지게 된 것, 미루어 두었던 여행들을 못하게 된 것, 모든 일이 아쉬웠다. 제일 아쉬웠던 것은 이제 한국에 가면 여기서 누렸던 시간적인, 정신적인 여유와 자유도 끝이라는 거였다. 더 서운하게도 마지막 두어 주 동안 리투아니아의 하늘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파란색과 햇빛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마치 이렇게 가면 제일 좋은 날들을 놓치는 거라고 잡는 것처럼.

마지막 산책은 언제나 걷던 코스였다. 소보라스 성당에서 구시가지의 구시청사 광장을 지나, 카우나스 성채를 돌아 네무나스 강변으로 돌아왔다.

귀국 준비하고 인사를 다니다 보니 어느새 귀국날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 떠나기는 아쉬워서 마지막 날 굳이 시간을 만들어서 마지막 산책에 나섰다. 해 나는 날이면 놓칠세라 다녔던 산책길을 마지막 인사 겸 꼼꼼하게 천천히 돌았다. 매일같이 출퇴근길이기도 했던 자유로는 여름을 즐기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구시가까지 쭉 뻗은 자유로에의 카페나 식당마다 테라스를 최대한 넓게 깔았다. 구시가지는 여름에는 거리 전체가 카페이자 바가 된다. 골목이 그리 넓지 않은데 다닥다닥 붙은 카페와 식당들이 테이블을 가득 깔아서 지나가는 길이 좁다. 아시아 여자 혼자 테라스에 앉아있으면 다들 쳐다보기 때문에 야외 테라스에 혼자 앉아본 적은 별로 없었다. 마지막 날인데, 싶어서 제일 보란 듯이 자리를 넓게 깔아놓은 집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서 스파클링 와인을 시키고 앉았다. 여름에는 관광객이 꽤 늘어서 아시아계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한국인이 분명한 그룹 여행객도 간혹 보인다. 대부분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다. 여름이 아니면 불가능한 이런 카페 놀이는 여행객이나 현지 주민이나 똑같이 열심이다. 


수도 빌뉴스는 여름에 꽤 관광도시가 된다. 마지막 주말에 작별을 고하러 찾은 빌뉴스는 8월 여름 햇살을 받으며 보란 듯이 빛나고 있었다. 구시가 골목은 그야말로 성수기를 맞았다. 카우나스보다도 골목이 좁은데 많은 외국 관광객이 몰려다녀서 군데군데 병목이 생길 정도로 붐볐다. 분명 낡아서 색이 바래고 칠이 벗겨지던 골목의 건물들도 희한하게 햇빛만 받으면 방금 칠한 원색 이상으로 예쁘게 빛을 발한다. '중세풍'이라고 하면 사실 좀 우중충한 빛깔이어야 제대로다. 중세 도시가 화사하면 왠지 이미지가 잘 안 맞는다. 하지만 이런 날씨에 방문한 여행객에게 리투아니아의 중세는 동화 속 왕국처럼 벽돌색과 파스텔톤이 어우러진 화려한 빛깔로 각인될 거다. 하얗게 빛나는 대성당과 성채, 전부 다른 색깔과 모양으로 개성을 발하는 성당들이 구불구불하게 중세 느낌을 살린 골목들과 어우러져 있다. 러시아 제국 지배와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직선적인 거리과 안타까운 현대사의 슬픈 이야기를 가진 건물들조차 여름 햇살 아래서는 치유라도 된 듯 예쁘게 빛을 냈다. 

여름철 빌뉴스의 구시가지는 어딜 보나 예쁜 중세풍 관광도시가 된다.

대학의 여름방학 기간이기도 한 6월부터 8월까지 여름의 발트는 그야말로 아름답다. 물론 이상기후로 여름에도 아침저녁은 꽤 서늘하고, 겨울이 빨리 오나 싶을 정도로 춥고 흐릴 때도 있다. 그래도 대부분은 푸른 하늘에 드문드문 박혀 있는 하얀 구름, 1년 치를 지금 다 쪼인다는 듯 쏟아지는 햇살이 가득하다. 산이 없고 평평한 지형이라 풍경이 지평선까지 펼쳐지는데, 참 단조로운데도 너무 예뻐서 질리지가 않는다. 사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이 여름에 너무 뜨거운 남유럽을 제외하면 유럽 모든 나라가 여름에 제일 좋고 여행의 적기이다. 발트도 예외가 아니고, 다른 계절과 격차가 너무 현저하다. 여름이 아닐 때 여행하겠다는 손님은 정말이지 말리고 싶다. 대신 여름에는 방문을 진심으로 추천한다.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여름날 빌뉴스와 카우나스는 정말 한 번 방문해볼 가치가 있다. '유럽 중세의 느낌이 가장 잘 살아있는 도시'라는 선전 문구는 꼭 과장은 아니다. 중세 분위기가 잘 살아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냉전이 끝나면서 독립국가로 거듭난 지 이제 30년 정도다. 낡고 오래된 모습과 새로 발전하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아직 관광객이 그렇게 많지 않다. 비교적 여유롭게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리투아니아에서의 2년 체류가 끝났다. 짧은 여름이 순식간에 끝나고 어느새 겨울이 오듯, 어느새 한국에 돌아왔다. 2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찰나같이 느껴진다. 여러 곳 여행도 다녔고 여러 가지 일과 경험도 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넘쳐나던 여유와 자유다. 그걸 굳이 채우지 않고 비워두며 누렸던 시간들은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 시간들에는 산책과 커피 한잔이 곁들여져 있다. 한국에 돌아온 순간 그런 여유와 자유는 온데간데 없어졌다. 한국이 더 잘 살고 발전한 나라인데, 주말이 되고 휴가를 가도 왠지 그런 여유로움을 누리기가 힘들다. 2년이나 있다 왔으니 당분간은 한국에서 열심히 굴러도 즐거운 마음으로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당분간'은 생각보다 되게 짧아서 금세 바쁜 일상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덕이기 시작했다. 기약 없이 훌쩍 떠나온 리투아니아가 이렇게 빨리 그리워지다니. 날씨 좋은 한국은 햇살도 더 많이 비치는데 그걸 도무지 즐기지 못하는 일상은 슬프기까지 하다. 조금씩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 먼 나라 이야기다. 

빌뉴스의 성당 중에 제일 작지만 제일 예쁜 성 안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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