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J의 이야기 (2)
여러분은 ‘과학’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무엇을 떠올리게 되는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학문?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무언가? 여러분이 떠올리는 이미지가 무엇이든 간에 그 어느 누구도 결코 과학이 없어져야 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바꾸어보겠다. 여러분은 과학을 평생동안 공부해 나갈 의향이 있는가? 이 질문에 이르면 사람들의 대답은 ‘예’, ‘아니오’로 양분되기 시작하지만, 두 개의 의견 각각에 해당하는 인원을 일일이 새어본다면 아마도 ‘아니오’ 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과학의 미래를 짊어지겠다며 나서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과학이 꼭 필요하지만 선택받은 자들만이 그것을 배워나갈 수 있다’라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다. 심지어 나조차도 과학은 엘리트들만이 공부할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생각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허점들과 잘못된 점들을 지금은 매우 잘 알고 있기에, 나와 같은 실수를 다른 사람들이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는 한다.
과학은 대중적인 학문으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 스스로 과학에 다가서려는 노력만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느 누구에게나 과학은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과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과학을 대중들에게 어필하여, 과학이 대중적인 학문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선입견을 가지고 선뜻 과학에 다가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중들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겉도는 과학의 모습을 J와 S라는 두 소년, 소녀에 투영하여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바로 ‘갈증’이다. 더운 여름이라는 계절적 배경 속에서 두 소년, 소녀는 저마다의 갈증을 하나씩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갈증은 진한 황산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갈증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 해소의 실마리를 찾아가게 된다.
‘S로부터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고 싶다’라는 갈증이 결국 증오라는 형태의 비뚤어진 감정으로 변하게 된 J의 모습과 ‘평범한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평범한 무언가를 느끼고 싶다’라는 갈증을 통해 고뇌하게 되는 S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과연 ‘나는 어떤 갈증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도 이 소설을 즐길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S의 오만함을 깨부수겠단 결심을 한지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S의 오만함을 당장이라도 깨부술 것 같던 그 당시의 모습과는 달리, 지금까지 난 S와 엮이는 것을 최대한 피하며 조용히 그 녀석을 증오해 오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겁쟁이에 지나지 않는가보다. S 녀석에게 한 마디도 제대로 쏘아붙이지 못하고 혼자서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이렇게 소심하게나마 그녀를 멀리하며 나의 적대감을 보여주겠다던 나의 각오는 며칠 전 화학 선생님의 입에서 흘러나온 공지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야 말았다. 그 녀석과 내가 실험 짝지가 되어 한 팀으로 수행평가를 진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공지가 있은 이후, 매일 밤마다 제발 수행평가 하는 날이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나 신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오늘 난 S 녀석과 한 시간 동안이나 함께 실험하면서 수행평가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실험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필요하지만, 그 녀석과 말을 섞는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짜증이 치솟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이에 대한 고민으로 이틀 내내 머리가 복잡했고, 어제도 계속 뒤척이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 결과, 지금 내가 바라보는 거울 속에는 눈이 반쯤 감긴 채 피곤에 절어버린 한 명의 초라한 소년만이 서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거울 속 내 모습이 며칠 사이에 부쩍 야윈 것 같기도 하다. S가 이런 내 모습을 본다면 온갖 무시와 비웃음이 가득한 눈길을 보내올 것이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지. 난 서둘러 정신을 가다듬어 세수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지만 없어진 식욕만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엄마가 정성들여 차려주신 아침밥을 거절하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열기가 온 몸을 감싼다. 8월이 끝나가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날씨가 선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이번 여름더위는 예년보다 더 오래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동시에, 걸음을 내딛으면 내딛을수록 뜨거운 햇살에 나도 모르게 몸이 축 쳐져서, 결국 고개까지 푹 숙이고 느릿느릿 걸어가게 된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친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보니 같은 반 단짝인 K가 혀를 살짝 내민 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야, 넌 덥지도 않냐. 웃음이 나오는 게 신기하다.”
한숨을 내쉬면서 내뱉는 나의 말에, K는 얼음물이 들어있는 페트병을 건네며 대답한다.
“난 원래 더위 잘 안타잖아. 네가 유달리 더위를 심하게 느끼는 거지. 무슨 땀을 이렇게 많이 흘리냐? 이 형님이 자비를 베풀 테니 이 물이라도 좀 마셔라.”
“물에 침이라도 뱉은 건 아니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 손으론 K가 건네준 페트병을 받아 들며, 나는 물을 벌컥벌컥 마셔댄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K가 다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오늘 실험 뭐하는지 알고 있냐? 어제 실험한 옆 반 애들 말로는 중화 실험을 했다고 한 것 같은데……”
“그런가? 몰라, 관심 없어.”
일명 ‘과학 덕후’라고 불리는 K가 화학실험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더위에 지쳐 잊고 있었던 그 녀석의 얼굴이 다시금 떠올라 짜증스럽게 대답한다. 나의 짜증 섞인 말투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K는 계속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한다.
“이 실험에서 작년까지는 선생님이 직접 묽힌 황산을 사용했거든? 그런데 올해는 우리가 직접 묽은 황산을 만들어본대! 재밌겠지? 그런데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위험하다고는 하더라. 뭐…… 그래도 재밌으면 된 거지. 그치, J?”
“아, 응. 그렇지, 뭐……”
K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의 머릿속에서 해서는 안 될 상상이 피어오른다.
‘S 그 녀석이 실험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 맘은 후련해질까?’
하지만 아무리 싫은 녀석이라 할지라도 그 녀석이 다치게 된다면 마음이 불편해질 것 같아, 얼른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그 불순한 상상을 지우려고 애쓴다.
그 뒤에도 한동안 K가 쉼 없이 재잘대는 소리를 들으며 교실로 들어선 나는, 곁눈질로 S의 자리를 살핀다. 빈 책상과 의자만 덩그러니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S는 등교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대로 그 녀석이 결석이라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린 그 순간, 교실 앞문으로 들어오는 S와 눈이 마주친다. 난 너무 당황해서 시선을 내리깔지도 못한 채, 한 동안 그 상태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 때 그 녀석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또 비웃는 건가’ 하는 생각에 짜증이 치솟아, 마주치고 있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속으로 그 녀석에게 욕을 퍼부어댄다. 다행히 S도 곧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앉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 녀석이 계속 교실 앞 편에 떡하니 서 있었더라면 난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한동안 바닥만 보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솟아오른 짜증만큼은 쉽사리 누그러지지가 않아서 결국 1교시는 수업을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로 쉬는 시간을 맞는다. 그리고 2교시 시작종이 치기 전에 미리 실험실로 가 있으라고 재촉하는 반장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짜증 섞인 마음은 어느새 걱정으로 바뀌어 간다.
‘실험할 때 그 녀석이랑 뭔 얘기를 해야 하지?’
이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아래층 화학 실험실로 내려가는 내내 계단에서 발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힘들게 실험실에 도착한 나는, 나보다 먼저 실험용 테이블 앞에 앉아있는 S를 흘낏흘낏 쳐다보면서 그 맞은편 좌석에 가 앉는다. 그리고 곧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려고 애써 보지만 앞에 앉아 있는 S가 신경 쓰여 계속 정신이 산만해진다. 얼핏 듣기에는 실험 시에 지켜야 할 주의사항이나 실험 순서 같은 것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자세한 얘기는 귀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다. 그래도 지금 S는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있을 테니까 그 녀석이 알아서 내 몫까지 잘 해주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내심 마음은 놓인다. 그 녀석을 싫어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의존하고 있는 내 모습이 위선적이게 느껴지긴 하지만, 수행평가 점수가 걸려있는 만큼 안도감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몇 분 후, 난 이런 기대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녀석이 갑자기 내게 진한 황산을 묽혀 달라는 임무를 내렸던 것이다. 진한 황산이 들어있는 플라스크를 앞에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니 등굣길에 K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진한 황산이라는 단어와 함께 무엇인가 위험하다는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점이 위험하다고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시 물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K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을 바라보지만, 녀석이 실험에 너무 몰두하고 있어서 관두기로 한다. 이렇게 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갑자기 S가 말을 건네 온다.
“음…… 무슨 문제 있니?”
왠지 그 말 속에 ‘이것도 못하냐?’라는 뜻이 숨어 있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 나는, 단호한 어투로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대답한다. 고개를 돌려 다시 염산과 수산화나트륨의 부피를 재기 시작하는 S의 떨떠름한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통쾌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내 앞의 플라스크에 시선이 닿자 곧 다시 암담함이 몰려온다. 그러다가 결국 진한 황산에 물을 넣어보기로 결심하고 플라스크에 담긴 황산의 일부를 작은 시험관에 옮겨 담는다. 실행에 옮기면서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잘 서지 않아서 우선은 엄청 적은 양의 황산만을 시험관에 옮기기로 한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기초적인 준비를 모두 끝낸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한 뒤에 드디어 스포이트를 이용하여 증류수를 한 방울, 두 방울, 들고 있는 시험관 속에 떨어뜨린다. 그리고 그 순간, 시험관에서 마치 불이 난 것과 같은 열기가 손바닥으로 전해져 온다. 난 그 열기를 참으며 억지로라도 시험관을 붙잡고 있으려 하지만, 점점 더 높아져 가는 온도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나도 모르게 시험관을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치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만다. 동시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던 나는 시험관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뜬다.
다행히 재빨리 뒤로 물러난 덕분에 내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은 것 같지만, 주변 친구들의 반응이 심상치가 않다. 혹시 다친 사람이 있는지, 불안이 샘솟고 있을 즈음에 화학 선생님이 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맞은편으로 달려오시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난, 내 맞은편에 앉아 있어야 할 S의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디 내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테이블 맞은편을 건너다보지만, 역시나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은 채 다친 S의 모습을 발견하고 만다. 이를 악물고 신음소리만 내고 있는 S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흐려져 가는 것을 느낀다. S의 팔에 기초적인 응급처치를 마친 선생님이 그녀를 업고 보건실로 달려갈 때까지도, 난 그 자리에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테이블 위에 흐트러져 있는 시험관 파편과 쏟아진 진한 황산만을 응시한다.
선생님과 S가 나가자마자, 실험실 안은 학생들이 내는 수군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워지고, 멍하니 서 있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친다.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면서 뒤를 돌아보는 내 눈 앞에, K가 화난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
“야, 이 바보야! 황산에다가 물을 바로 넣으면 어떡해! 진한 황산은 탈수 능력이 강해서 물에다가 황산을 조금씩 넣어가는 방법으로 묽혀야 한단 말이야!”
K가 흥분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퍼부어대지만, 솔직히 그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미 난 주위의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어, 나만의 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도대체 방금 전에 내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직까지 실감이 잘 나지가 않는다. 등굣길에 잠시 S가 다쳤을 때의 상황을 상상하긴 했지만, 진짜로 그 녀석이 다치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S는 상처를 입고 보건실로 업혀가게 되었다. 다른 이유도 아닌 내 부주의와 자존심 때문에... S가 도움을 줄지 내게 물어봤을 때 난 그냥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야만 했다. 그깟 자존심이 뭔지, 그 녀석 앞에서 바보 취급 받는 게 싫어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이런 상황까지 와버렸다. 죄책감에 온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 때 소란스런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아이들 사이로 화학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걸어오신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담임선생님의 팔을 붙잡으며 화학 선생님이 나지막하게 말을 건넨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황산 방울이 팔에 튀어서 가벼운 화상을 입은 것뿐이니깐. 기본적인 치료와 소독은 다 끝냈고 만약에 대비해서 잠시 병원에 들렀다가 다시 온다고 했다.”
화학 선생님의 뒤를 이어 갑자기 담임선생님이 내게 호통을 치신다.
“이 녀석! 네 부주의로 누군가는 영원한 흉터를 가지고 살 수도 있는 법이다! 앞으로 선생님 말씀 제대로 안 듣고 네 멋대로 행동하면 정말 혼날 줄 알아라!”
담임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귀에 꽂히며 가슴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것 같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눈가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온다. 아, 내가 울면 안 되는 건데…… 다친 건 그 녀석인데……… 울 자격도 없는 내가 눈물을 보이면 정말 안 되는데…… 역시 생각과 몸은 항상 따로 작동하는 법인가 보다.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계속 눈물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두 선생님과 주변의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사건이 발생한 그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기며 말없이 한숨만 내쉬고 있다.
그렇게 십 여분이 흘러갔을까? 어느 정도 눈물이 멈춘 후 콧물만 홀짝이고 있던 내게 교무실로 따라 오라는 담임선생님의 명령이 떨어진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상세하게 적은 후에 다시 교실로 가 있으라는 말을 남긴 채 담임선생님은 다시 자리를 비우시고, 나는 교무실 귀퉁이에 마련된 작은 책상 앞에 앉아 반성문처럼 생긴 양식의 빈 칸에다 또박또박한 글씨로 S가 화상을 입기 전까지의 과정을 채워나간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써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 녀석에게 느끼는 나의 죄책감과 미안한 감정을 전부 담아내기 위해서는 한 글자도 대충 써서는 안 된다는 스스로의 중얼거림이 내 귓가에 어른거린다.
그렇게 3교시가 다 끝나고 다시 4교시가 시작되어서야 비로소 상황기술을 완료한 나는, 빼곡하게 빈 칸을 채운 종이를 담임선생님의 교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무거운 발걸음으로 교실에 들어간다. 다행히 체육 시간이라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그제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교실 앞 게시판을 바라본다. 그 때 교실 앞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S가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나의 모습을 본 S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몇 초간 그대로 서 있기만 하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내 앞으로 걸어온다. S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가 않는다. 그렇게 시선을 피하며 고개만 숙이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S가 말을 건넨다.
“넌 체육수업 들으러 안 나가니?”
너무 뜻밖의 얘긴지라 나는 고개를 들어 S를 바라본다. 그런 나를 보며 S는 또 한 번 묻는다.
“애들은 다 체육수업 들으러 나갔는데 왜 너만 이러고 있어? 혹시 덥다고 꾀병 부리는 거?”
S의 목소리는 그렇게 심각하지가 않다. 그보단 장난이 섞인 목소리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 분명 S가 학교에 돌아오면 내게 화를 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그녀가 내게 보이는 의외의 반응에 당황하고 만다.
“왜 아무 말도 안 하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S의 모습에 난 결국 고개를 다시 숙인 채 입을 연다.
“미안해……”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내 자리 앞의 의자를 빼서 걸터앉는다. 그리고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에이, 뭐 이런 것 가지고 미안해 하니? 괜찮아.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래도…… 네가 다쳤잖아. 내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 정말 미안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말하는 나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주시하던 S는, 갑자기 창 밖 운동장으로 시선을 옮기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음…… 요즘 날씨가 더워서 애들 모두 축 처져 있잖아. 아마 진한 황산도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S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는 운동장을 향한 시선을 그대로 고정한 채 말을 잇는다.
“아니, 생각해봐.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황산이라고 기운이 남아나겠니? 걔도 아마 엄청 목이 탔을 거야. 그래서 내가 걔한테 물 좀 적선한 셈 치려고.”
엉뚱한 S의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마도 그녀는, 너무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녀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관대함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의 S는 내게 이런 관대함을 베풀 사람이 아니다. 그보단 내 멱살이라도 잡고 ‘너 같은 바보 녀석 때문에 내가 다쳤잖아’라며 화라도 냈어야 옳은 것이다. 현실 속에서 S가 내게 보이는 반응이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온 그녀의 모습과 괴리감을 빚어내자 갑자기 큰 혼란이 머릿속을 뒤덮는다. 나는 정말 S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이젠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또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기준이 흐려지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그 크기를 키워가며 점점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한 달 전 그 탈의실에서 그와 같은 말을 했던 것일까? 계속 같은 의문을 몇 백 번, 아니 몇 천 번 되뇌어 보았지만 그 해답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나도 모르게 그 말이 툭 튀어나오고야 만다.
“그 땐……. 왜 그랬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민망해진 나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지만, 어느 새 S의 시선은 나를 향해있다.
“응? 무슨 얘기니?”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S의 모습을 곁눈질로 한 번 흘낏 쳐다본 후 나는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를 해야겠지…….
“저번에 네가 탈의실에서 누군가와 통화할 때 들었어. 상위권이 아닌 애들과는 친해지기 싫다고, 공부 못하는 애들이 싫다고, 그렇게 말했었잖아. 왜 그렇게 말했던 거야?”
S는 당황한 얼굴로 입만 벌린 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한번 말문이 트이고 나니 도저히 난 말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난 네가 엘리트들 하고만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어. 나처럼 공부를 못하는 애들은 일부러 피하려 한다고 말이야…….실제로 너 그랬잖아. 우리 같은 애들하고는 말도 잘 섞지 않고, 우리가 모여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면 비웃기만 했지. 그렇게 우리가 싫었던 거니? 우리가 너한테 뭘 잘못했는데? 도대체 뭘…….”
결국 울컥해버린 나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보이고 만다. 그런 내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S는 말없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아니야”
갑작스럽게 흘러나온 S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린 나의 시선이 그녀의 떨리는 어깨에 닿는다. 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듯한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너희를 무시한 게 아니었어. 단지…… 단지 너희에게 다가가는 게 너무 힘들었을 뿐이야. 너희와 어울려 노는 상상을 하며 한 발자국씩 다가서다가도 항상 마지막 순간에 용기가 나질 않더라. 나도 이런 내가 너무 싫어…… 하지만, J. 한번만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지 않겠니? 지금까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희를 지켜봐 왔는지, 그 이야기만이라도 들어줬으면 좋겠어.”
눈물이 복받치는지 다시 약간의 침묵이 있은 후에 S가 울먹이면서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까지 내가 그녀에 대해 생각해 오던 모든 것이 단순한 오해에 불과하였음을 깨닫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