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도 가계부를 쓰는 사람이 있나 모르겠다. 나는 수년간 가계부를 써오고 있다. 물론 앱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쓴다는 말처럼 직접 손으로 작성하지는 않는다.
앱으로 가계부를 정리할 때 가장 좋은 점으로 나는 통계를 꼽는다. 십수 년 전 가계부를 쓸 때는 월 말이나 연 말마다 모든 걸 더하고 빼며 수기로 계산했었지만, 이제는 버튼만 누르면 주간, 월별, 연간 통계가 나오니 안 쓸 이유가 없다.
내가 가계부를 쓰게 된 건 군 시절 매점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당시 내가 있던 곳은 산골짜기였던지라 그 흔한 포스기(결제 매출 시스템) 하나 없었다. 이른바 '금전출납부'라는 걸 작성했는데, 왼쪽에는 받은 돈, 가운데는 과자 가격, 오른쪽에는 거스름돈을 기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사용했던 장부는 양지사에서 나온 검은 인조가죽 커버가 달린 다이어리였다. 그런데 그게 내 눈에는 그게 꼭 영화 속 비자금 관리를 할 때 쓰는 검은돈이 오가는 비리 장부처럼 보였다.
당시 금전출납부의 커버가 까맣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 노트가 더 검게 보인 보인 이유는 실제로 그곳에 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수작업으로 이뤄진다는 말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리 장부의 클리셰가 그런 모양이었을까? 아무튼 이때 가장 쉽고 이득을 많이 챙길 수 있는 비리 방식은 판매가를 속이는 것이었다.
산골 부대에서는 잔돈 수급이 힘들다는 이유로 십 원 단위를 절상해 가격을 책정하는 게 관례였다. 거기서 남는 잉여금은 분실이나 파손에 사용될 예비비로 사용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나의 욕심 많은 선임은 그걸 악용했다. 단순하게 10원 단위를 50원 단위로 맞추는 게 아니라, 100원 이상씩 자기 마음대로 올려 받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저렴하기만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니까, 매점에 들어오는 상품의 매입가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곳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가 있었다. 선임이 그 비밀을 내게 공개한 건 자신의 전역을 한 달여 앞두고서였다. 끝까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참으로 치밀한 녀석이었다.
"야 내 이전 선임은 여기서 차도 한 대 뽑아서 나갔어, 그래도 나니까 양심적으로 최대한 적게 올린 거야, 나는 겨우 컴퓨터 바꿀 정도밖에 못 벌었다니까"
라며 마치 자신이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선임을 신고할까 싶었지만, 괜한 하극상 문제로 불똥이 번지는 게 아닌가 싶어 한 달만 참기로 했다.
그리고 선임이 집으로 돌아가고 내가 점장이 된 뒤, 나는 대대적인 가격 조정을 시행했다. 그제야 드러난 이전 선임들의 만행과 부대 매점의 운영 실태는 큰 논란이 되는듯했으나,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더 이상 일을 키우지 않기로 협의하면서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그 후 내가 전역한 뒤, 나의 뒤를 이은 후임자는 이전 선임들이 했던 악습을 되살려 큰 이득을 보려다 낭패를 봤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그곳에도 드디어 포스기가 도입됐다는 웃지 못할 소식이 들려왔다.
왜 꼭 불이 난 뒤에야 집을 고치는 걸까. 처음 발견된 순간부터 잘할 수는 없었던 걸까? 요즘 나오는 뉴스 기사들을 보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미련함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끼곤 한다. 더 이상 이런 어리석음이 이어지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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