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마음

by 오제이 Mar 11. 2025


요즘에도 가계부를 쓰는 사람이 있나 모르겠다. 나는 수년간 가계부를 써오고 있다. 물론 앱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쓴다는 말처럼 직접 손으로 작성하지는 않는다.


앱으로 가계부를 정리할 때 가장 좋은 점으로 나는 통계를 꼽는다. 십수 년 전 가계부를 쓸 때는 월 말이나 연 말마다 모든 걸 더하고 빼며 수기로 계산했었지만, 이제는 버튼만 누르면 주간, 월별, 연간 통계가 나오니 안 쓸 이유가 없다.



내가 가계부를 쓰게 된 건 군 시절 매점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당시 내가 있던 곳은 산골짜기였던지라 그 흔한 포스기(결제 매출 시스템) 하나 없었다. 이른바 '금전출납부'라는 걸 작성했는데, 왼쪽에는 받은 돈, 가운데는 과자 가격, 오른쪽에는 거스름돈을 기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사용했던 장부는 양지사에서 나온 검은 인조가죽 커버가 달린 다이어리였다. 그런데 그게 내 눈에는 그게 꼭 영화 속 비자금 관리를 할 때 쓰는 검은돈이 오가는 비리 장부처럼 보였다.


당시 금전출납부의 커버가 까맣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 노트가 더 검게 보인 보인 이유는 실제로 그곳에 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수작업으로 이뤄진다는 말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리 장부의 클리셰가 그런 모양이었을까? 아무튼 이때 가장 쉽고 이득을 많이 챙길 수 있는 비리 방식은 판매가를 속이는 것이었다.



산골 부대에서는 잔돈 수급이 힘들다는 이유로 십 원 단위를 절상해 가격을 책정하는 게 관례였다. 거기서 남는 잉여금은 분실이나 파손에 사용될 예비비로 사용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런데 나의 욕심 많은 선임은 그걸 악용했다. 단순하게 10원 단위를 50원 단위로 맞추는 게 아니라, 100원 이상씩 자기 마음대로 올려 받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저렴하기만 하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니까, 매점에 들어오는 상품의 매입가가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그곳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가 있었다. 선임이 그 비밀을 내게 공개한 건 자신의 전역을 한 달여 앞두고서였다. 끝까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는 참으로 치밀한 녀석이었다.


"야 내 이전 선임은 여기서 차도 한 대 뽑아서 나갔어, 그래도 나니까 양심적으로 최대한 적게 올린 거야, 나는 겨우 컴퓨터 바꿀 정도밖에 못 벌었다니까"


라며 마치 자신이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선임을 신고할까 싶었지만, 괜한 하극상 문제로 불똥이 번지는 게 아닌가 싶어 한 달만 참기로 했다.


그리고 선임이 집으로 돌아가고 내가 점장이 된 뒤, 나는 대대적인 가격 조정을 시행했다. 그제야 드러난 이전 선임들의 만행과 부대 매점의 운영 실태는 큰 논란이 되는듯했으나, 각 부서의 책임자들이 더 이상 일을 키우지 않기로 협의하면서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그 후 내가 전역한 뒤, 나의 뒤를 이은 후임자는 이전 선임들이 했던 악습을 되살려 큰 이득을 보려다 낭패를 봤고, 그것이 시발점이 되어 그곳에도 드디어 포스기가 도입됐다는 웃지 못할 소식이 들려왔다.



왜 꼭 불이 난 뒤에야 집을 고치는 걸까. 처음 발견된 순간부터 잘할 수는 없었던 걸까? 요즘 나오는 뉴스 기사들을 보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미련함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느끼곤 한다. 더 이상 이런 어리석음이 이어지지 않길 바라며.






오제이의 <사는 게 기록> 블로그를 방문해 더 많은 아티클을 만나보세요.

https://blog.naver.com/abovethesurface


작가의 이전글 터틀넥을 입게 될 줄이야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