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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gang Oct 15. 2021

눈부시다

2021년 10월 14일


 환절기가 되면 발이 먼저 말을 해요. 체질적으로 몸이 찬 사람의 특징은 찬바람이 분다 싶으면 발이 시려오거든요. 발이 시리면 뼛속까지 냉기가 느껴져요. 시리다 못해 발이 아리거든요. 그러면 결국 목이 컬컬해지고 한기가 들고 대번 가래가 생겨요. 환절기를 조용히 넘어가질 못해요. 며칠 몸살을 앓아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매년 된통 앓던 환절기 감기를 코로나로 가볍게 넘긴다는 건 좋은 걸까요? 전 지금 마스크 효과를 절묘하게 보고 있거든요.


 며칠 비가 오면서 기온이 떨어졌었잖아요. 그때 옷을 얇게 입고 외출을 하는 바람에 목감기가 살짝 와버렸어요. 추울 때는 너무 얇게 옷을 입었고 오늘은 또 너무 두껍게 옷을 입고 말았네요. 약간 더웠어요. 어지간해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지 않는데 먹고 말았어요. 왠 줄 아세요? 햇살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햇살이 너무 눈부셔서요. 어찌할 수 없는 이 아름다움을 혼자 감당하기가 너무 벅차서 눈부신 하늘을 닮은 흰 얼음덩이를 입 안 가득 넣고 오도록 씹어보고 팠거든요. 그런데요. 온몸의 기운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젖어들 때는 얼음도 약이 되나 봐요. 목감기가 심해질 줄 알았더니 감쪽같이 나아버렸거든요. 신기하지요?


 오늘은 도농역 앞에서 잠실행 좌석버스를 탔어요. 며칠 냉하던 날씨가 반짝 해가 돋으니 몸도 마음도 반짝 빛나는 것 같았어요. 세상이 빛나더라고요. 나무에도 포도에도 빛의 일렁임은 세상을 잊어도 될 것 같은 눈부심이었거든요. 하늘은 또 어떻고요. 솜사탕보다 더 하얀 솜털 구름 말이에요. 이렇게 날씨가 예뻐도 되는 걸까요? 김화영 선생이 반한 카뮈가 좋아하는 지중해 빛이 이런 색깔일까, 짐작을 해보곤 해요. 잠실 광역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알라딘 롯데월드타워점을 지나 10번 출구로 빠져나왔어요.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지만 저는 늘 걸어요. 두정거장인데 버스를 기다리기가 늘 어중간하더라고요. 그 구간을 걷는 길이 참 행복해요. 그 보도블록 가운데는 큰 벚나무가 줄지어 있거든요. 봄날 벚꽃이 피면 그 길은 황홀한 꽃길이 되어요. 벚꽃이 지고 나면 상가 사람들은 보도블록 가운데 예쁜 화분을 줄지어놓아요. 계절마다 화분은 바뀌거든요. 걸을 때마다 참 기분이 좋아요. 나를 위해 마련한 꽃길 같아서요.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보도블록 틈에는 온갖 풀꽃들이 돋아나거든요. 강아지풀 질경이 씀바귀 심지어 갈대까지 돋아요. 틈이 있는 곳마다 돋아나는 풀꽃들. 하늘에서 초록별이 내려온 것 같은. 틈을 내어 준 보도블록, 그 틈마저 우주의 기운이 상생하는 이 지상의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라고 나는 외치고 싶은 거예요.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그래서 오래오래 걷고 싶은, 잠실역에서 올림픽공원까지 가는 도심 속 그 길. 도심인 듯 도심이 아닌 듯 나인 듯 내가 아닌 듯 걷게 되는 길.     


 김서령 작가는 <구월이 왔다>는 수필에서 ‘파라다이스 빔’이라는 말을 썼더라고요. 이맘때 보도블록 위에, 잔디 위에 또렷한 나무 그림자를 그려 넣는 빛살을 ‘파라다이스 빔’이라고 한다네요. ‘내가 수십 년 창가에서 바깥을 내다보며 종내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했던 그것, 시공간을 초월하듯 비지상적인 감격, 그걸 언어로 치환한 것이 바로 파라다이스였구나.(김서령, 구월이 왔다)’ 저도 오늘은 그 파라다이스 빔을 맘껏 즐겼어요. 이 아름다운 가을날을 어찌할거나 마음으로 외치면서요. 그만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그 눈물 때문이었던 것일까요? 더 눈부시고 더 빛나고 더 아름다웠던 까닭이요. 천국이 이런 느낌인 것일까요?

 김서령 작가는 구월의 파라다이스 빔을 보았지만 저는 시월의 파라다이스 빔을 보았지요. 곧 단풍이 물들고 단풍이 지고 가을은 가겠지요. 가을이 다 질 때까지 저는 매주 목요일 그 길을 걸을 거예요.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어쩜 털코트를 입고 장갑을 끼고 모자를 쓰고 걸을지도 몰라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쓸게요.



..........


*일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매일 저녁 9시. 매일의 루틴을 만든다는 것, 저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지요.

그 일기 중 하나, 가끔 여기 올려놓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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