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과거에 썼던 기록물들을 본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기록이 세세하고 명확할수록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언젠가는 제가 작성하고 있는 지금 이 글도 미래의 저에게 큰 기쁨을 줄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어쩌면 회고록의 느낌이 강하게 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첫 연봉협상에 관한 기록을 이야기로 풀어낼 계획입니다. 여렸을 때는 소설작가가 꿈이었지만, 저의 필력으로는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현실감 있는 글을 쓰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최대한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자 노력하였고 이번 에세이에서 처음으로 세세한 저의 이야기를 올려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는 객관적인 자료와 석학의 명언들을 바탕으로 썼기에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을 쓰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이야기들이 있기에 지금의 사회가 재밌는 것처럼 누군가에겐 저의 개인적인 경험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글을 적어봅니다.
제가 일하는 회사는 메신저로 소통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특히 제가 맡은 업무는 꾸준하게 최적화된 답을 찾아야 하는 업무였기에 팀원의 자리에 찾아가 직접 소통하는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메신저에 알람이 온다는 것은 전체 공지나 사내 이벤트가 있을 때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제가 속한 부서의 임원님께서 저에게 개인 메시지 주셨습니다.
“사각님 안녕하세요. 혹시 시간 좀 되시나요?”
연초에 임원분이 저를 찾는 이유는 당연히 연봉협상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업기능요원에서 정직원으로 신분이 변환되는 시기이기에 나름의 기대감과 긴장감을 가지고 답장드렸습니다.
“아 네! 라운지여서 바로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1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답장이 왔습니다.
“5번 회의실로 와주시면 됩니다.”
“넵! 확인하였습니다.”
5번 회의실은 20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회의실입니다. 리모델링한 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아 공사자제냄새와 원목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옵니다. 회의실 안에는 약 300M의 큰 테이블과 문 맞은편에는 대형 모니터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흔하지 않은 좌식회의실로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지만, 저는 바닥이 뚫려있어 의자와 앉는 것과 별 다를 것이 없었기에 피하는 회의실은 아니었습니다.
문을 열자 문과 가장 먼 왼쪽 자리에 임원분이 앉아계셨습니다. 이렇게 큰 테이블에 사람이 혼자 있으니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굳이… 이렇게 큰 곳에서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테이블 구석에는 보드게임 동호회분들이 쓰시는 보드게임들이 쌓여있었습니다. 임원분께서는 저의 상여금과 연봉이 책정되는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몸을 테이블 쪽으로 기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동료들이 평가한 사각님 점수를 볼까요?”
생각보다 점수는 좋게 나왔습니다. 굳이 등수를 따진다면 회사 내에서 제 점수는 15% 정도 안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신입사원이신 걸 감안하면 점수가 정말 좋게 나왔 어요… 특히 커뮤니케이션과 책임감 부분에서는 만점을 받으셨네요. 사각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회사 생활을 잘하셨네요…”
저는 칭찬 앞에 조건이 붙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방대치곤 잘한다.”, “남자치곤 세심하다.” 와 같은 칭찬은 긍정적인 감정과 함께 부정적인 감정도 불러일으킵니다. 그렇기에 저는 누군가를 칭찬할 때 칭찬만 하려 노력했습니다.
‘신입사원 치고 잘한다’는 말은 긍정적인 감정으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제가 신입사원이 아니었다면… 잘한 건 아니다.’라는 뜻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받아드려지 않아도 되지만 이상하게 이런 말을 들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지만 그래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이 감정을 숨기고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실수를 많이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제가 정말 인상 깊게 본건 사각님 스스로 평가한 평가 점수와 동료들이 사각님을 평가한 평가 점수가 거의 일치한다는 거예요. 거의 일치가 아니라 그냥 일치하네요…”
“감사합니다”
“가장 중요한 직속 상사의 평가에서도 거의 만점을 받으셨어요… 근태 기록도 좋네요… 1년 동안 지각을 한 번도 안 하셨어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저도 궁금하네요.. ㅎㅎ”
“8시 30분이면 일단 8시까지 오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겨도 지각은 안 하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대화를 이어가도 ‘신입사원치곤’이라는 단어는 마치 민트 사탕을 오래 입에 머금은 것과 같았습니다. 사탕을 다 먹어도 그 향이 입에 오래 남아 머릿속을 자극하는 것처럼 그 말 한마디가 머릿속을 계속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그 단어 때문에 임원님과의 대화에 집중을 못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아쉬운 부분에 대한 평가는 신입사원의 실수가 조금 있었다네요.. 물론 이 부분은 직원들 모두가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말 그대로 신입사원이 실수를 안 한 경우는 없었어요. 이건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사실은 사각님 스스로 이를 인지하고 자신 평가 항목에 이 부분을 명확하게 적으셨다는 거예요.”
위로의 말씀을 해주신 것일 수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중요했습니다.
“그 부분은 저도 항상 생각하고 있어서요.. 지금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신가요?”
“저희 회사의 업무 과정이 기록되어있지 않았던 게 힘들었습니다. 저의 대부분의 실수가 기록되지 않아 발생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가 개발한 부분을 문서화하고 있습니다. 그럼 적어도 같은 실수를 할 일은 별로 없어지더라고요.”
“사실 우리 팀이 명확한 업무 프로세스가 없긴 합니다. 대부분 오래 근무하셨던 분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일이 돌아가고 있어요. 확실히 신입사원분들이 오면 조직의 단점을 찾고 보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나중에 문서 좀 보여주세요 ㅎㅎ”
“서버팀에서는 이미 쓰고 있어서 언제든지 저희 팀 문서파일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ㅎㅎ”
“사각님에 대한 저의 총평을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근태가 좋고 책임감이 높음. 또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 동료들과의 협업 과정에서 수월한 모습을 보여줌. 신입사원에게 커뮤니케이션을 기대한 적인 없지만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음. 다만 신입사원이 저지를만한 작은 실수를 몇 번 보여주었음. 이는 충분히 개선 가능성이 보임.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장기적으로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인재로 평가됨.”
평가는 좋았습니다. 계약직을 제외하면 사회에서 제가 받은 첫 평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남아있었습니다. 퇴근 후 동생과 잠깐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님의 퇴임식에 관한 준비를 해야 했기에 그 당시에는 저녁마다 전화를 했습니다.
“형 상패는 주문했어.”
아버님의 퇴임식에 사용할 상패를 동생에게 부탁하였었습니다. 지금까지 가족을 위해 고생해 주신 아버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상패였습니다.
“오케 퇴임식 때 읽어드릴 편지는?”
“편지는 내일까지 써서 형 보내줄게. 연협 잘했어?”
“야 아니 들어봐. 신입사원치곤 점수가 높다.라는 말이 칭찬이야?”
“칭찬이지”
“아니 왜 칭찬이야 내가 신입사원이 아니면 안 좋다는 거잖아.”
“그게 왜 안 좋은 거야. 신입사원 치고 잘했다는 게 신입사원이 아니었으면 못한 거다.라는 의미가 아니잖아”
“그 의미 아니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나 글쓰기 수업과제 해야 해. 칭찬 좀 비틀지 마. 끊는다.”
저는 포커 게임을 정말 좋아합니다. 이 포커 게임에는 블러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블러핑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자신이 들고 있는 패가 좋은 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저 사람의 행동이 블러핑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고 이는 정말 깊은 생각을 요구합니다.
저는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말이 블러핑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신입사원치곤 잘한다.'라는 말이 블러핑인지 아닌지를 혼자 고민합니다. 마치 포커 게임을 하듯이 상대의 행동을 계속 비틀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포커에서도 그렇듯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저에게 더 좋을 때가 많습니다. 칭찬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설령 그 칭찬이 정말 블러핑일지라도 저에게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와 대화하는 모두가 포커 게임을 하듯이 대화를 비틀어 말하지 않습니다. 비틀어 말해도 굳이 부정적인 속뜻을 비틀어 찾아낼 필요도 없습니다. 어쩌면 천진난만하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생활에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적어도 남이 해주는 칭찬에서만큼은 말입니다...
자신감이 큰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칭찬에 대해 스스로 부정하고 그런 저의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칭찬의 속뜻을 뜯어보려 합니다. 칭찬은 사람이 자랄 수 있는 양분인데, 들어오는 양분을 스스로 쳐내고 있던 셈입니다. 지금은 타인이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예전보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동생과의 전화는 항상 간결합니다. 대부분 1분을 넘기지 않으며 목적만을 말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가끔 이런 동생의 단순함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단순함에서 칭찬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습니다. 굳이 대화를 비틀어 들을 필요는 없다는 점과 단순함은 생각보다 장점이 많다는 점은 앞으로도 제가 살아가면서 가끔씩 예민한 저에게 큰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