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그가 소뼈에서 살을 발라 주었다. 그가 목욕을 하러 간 사이 나는 그 고기를 작은 화로에 구웠다.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내가 잠깐 한눈을 판 것일까? 불판 위에서 맛있게 익어가던 갈빗살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너무 화가 나서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마침 그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던 중이었다.
"우리 고기를 누가 다 먹어버렸어!"
씩씩대는 나를 달래는 그의 손을 잡고 화롯가로 왔다. 텅 빈 불판에 화롯불만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술 더 떠서 그 옆에는 빈 김치 그릇이랑 젓가락이 널브러져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한 나는 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 고기! 도대체 누구야???? 누가 이렇게 다 먹고 설거지도 안 하고 간 거야?"
옆에 누군가 보인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시절 함께 일하던 동료 간호사였다. 범인은 그들이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간호사들!
꿈에서 깨서도 억울한 마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억울해. 내 고기를 다 먹어버렸어."
그는 웃음을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갈빗살을 먹기로 했다.
갈빗살은 갈빗살이고, 깨어서까지 생생한 감정이 살아있는 꿈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꿈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꿈에서 음식은 영적인 자양분이라고 했던 책이 생각났다.
식당에서 꿈이 전개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은 영적인 자양분과 연관이 된다. 음식을 먹으면 아프다는 속설은 아픔 없이 커다란 영적 성장이 일어나기 쉽지 않기에 그런 것 아닌가 추정해본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경우 염려보다는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고혜경, <나의 꿈 사용법> 195쪽
어디로 내 기가 세어나가고 있는 거 아니야?
뭐야! 도대체 누구야? 누가 내 기를 쪽쪽 빨아먹고 있는 거야?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는 영적인 자양분을 강탈당한 것인가?
꿈속의 동료 간호사들에게?
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은 나,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들에게 투사한 나의 모습.
3차 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동료 간호사들을 보며 나는 어떤 생각을 했더라? 어떤 감정들을 느꼈더라?
열등감.
왜 나는 저들처럼 능수능란하게 일을 하지 못하는 걸까?
외로움.
물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아. 지금 나는 이 속에 전혀 섞이지 못하고 있잖아. 여긴 마치 외계인이 사는 나라 같아.
질투.
내가 저들보다 못한 게 뭐지? 저들이 나보다 더 나을 리 없어. 이건 분명 뭐가 잘못된 거야.
냉소.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해? 의사가 무슨 신이라도 돼? 자존심도 없나!
그리고 연민.
말도 안 되는 업무량을 감당해야 했던 3차 병원 응급실, 그곳에서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다. 어쩌면 이건 전우애의 일종일지도 모르겠다. 극한 상황을 함께 하는 이들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연대감, 서로에 대한 애틋함.
아직도 그 시절, '이건 내 것이 아니라 당신 것'이라고 우기며 외면하던 나의 못난 모습을 나는 꾹 밟고 있는가? 수많은 나를 커다란 나무 상자 속에 쑤셔 넣고 뚜껑을 덮은 채 쇠사슬로 꽁꽁 묶어 놓았을까? 그곳을 뚫고 나오려고 애쓰는 수많은 나, 나의 그림자들. 온 힘을 다해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 발버둥 치다 허기가 져서 나의 고기를 몰래 다 먹어버린 걸까?
그러면 내 기를 빨아먹고 있는 건 나의 그림자들, 바로 나야?
그래, 그럴지도.
꼭 병원에서만은 아니었겠지. '나는 이런 사람 아니야'라며 던져버린 모습들, 다른 사람에게 전가해버린 나의 면면들.
사실 좀 뻔뻔해져도 되는 거 아니야?
문득 든 생각.
사람이 항상 완벽하면 그게 사람인가?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처음 경험한 사회생활, 그 속에서 헤매는 사회 초년생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거 아니야?
지금까지 나는 너무 오랫동안 이십 대의 나에게 못되게 굴고 있었다. 완벽하지 못했다고, 너무 어리바리했다고. 삼십 대의 나를 너무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있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정신 차리지 못했다고. 여전히 물속에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존재였다고. 이런 식이라면 지금, 사십 대 중반의 나를 육십 대의 나는 여전히 타박하겠지? 칠십 대의 나는 육십 대의 나를 못마땅해하려나? 그러면 죽음의 순간 눈을 감기 직전의 나는 나의 인생을 뭐라고 생각하려나?
이대로는 안 되겠어. 죽기 직전까지도 내가 나를 구박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그건 너무 서글프잖아. 못나면 좀 어때. 그러니까 예쁜 거잖아. 거기에 새로운 배움이 있으니까. 그 안에 환희가 있으니까. 모든 처음 속에서 경험했던 그 환희들.
얼음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아빠 손을 놓고 스케이트를 신은 발을 떼던 날,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몇 바퀴 앞으로 나가던 날, 그런 처음들 속에서 느꼈던 환희.
너무 완벽하기만 하면 배움이 낄 자리가 없잖아. 모험의 여지도 없잖아. 그건 삶이 아닐지도 몰라. 허구일 뿐.
못난 나는 환희를 선물하는 전령인 거야.
미안해, 구박만 해서.
용서해줘, 상자 속에 꽁꽁 숨겨두려고만 해서.
고마워, 용기 내서 꿈속에 찾아와 그 고기를 다 먹어준 것 말이야. 내가 챙겨줬어야 하는건데.
사랑해, 모자라고 못난 수많은 나를.
이런 날에는 로즈 오또지!
장미꽃향과 풀향이 오묘하게 뒤섞인 로즈 오또를 심장이 있을 법한 자리에 발라주면 익숙한 듯 낯선 향이 몸에 스며들어 코로 올라온다. 나의 채취와 섞인 그 향은 나만의 향이 되어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나를 안아준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이런 사랑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