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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Dec 24. 2020

사랑의 묘약

이런 날에는 이런 향기

부부싸움에 처방하는 오일이 있다. 로즈 오또와 자스민 앱솔루트.

에센셜 오일을 처음 배울 때 이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그런데 두 오일이 부부싸움을 해결하는 방법 좀 다르다. 하나는 상대가 안쓰러워 화해하고 싶어 지게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가 뜬금없이 예뻐 보여서 마음이 풀리는 것이란다. 안쓰러운 마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에센셜 오일이 로즈 오또,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것이 자스민 앱솔루트다.


정말일까? 궁금했다.

사랑의 묘약도 아니고 어떻게 내 눈에 콩깍지를 씌운다는 거지?


자스민 오일을 써도 세상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남편이 특별히 더 사랑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뭘까? 나에겐 자스민 오일의 효과가 없는 걸까? 효과는 의외의 상황에서 나타났다.

그날은 아침부터 자스민 오일이 끌렸다. 어떤 날은 아기 똥내가 나는 자스민 오일이 그날따라 싱그러운 꽃내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스민 오일로 기분 좋게 마사지를 하고 책상에 앉았다. 한 달 정도 남은 강의 자료를 며칠 전부터 만들고 있었다. 기한이 닥쳐서 후다닥 하는 걸 싫어하는 지라 여유 있게 하나씩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모든 자료를 다 만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저녁이 되기도 전에 과부하가 걸려 노트북을 덮어버렸을 것이다. 밤 9시에는 침대에 들어갔을 것이다.

자스민인가?

왜 사람이 아니라 노트북이야?

내가 만드는 자료와 사랑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거야?

내가 사랑에 빠진 건 시간이었다. 우리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순간의 시간들.


자스민 오일이 사랑의 묘약인 건 현재에 집중하게 만드는 힘 때문이다. 

현재에 집중한다는 건 어떤 상태일까? 당신은 당신이 현재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어떻게 알아채는가?

자스민 오일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하는 일을 보면 현재에 집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자스민 오일이 우리 몸에 들어와서 하는 일은 말초혈관 순환을 자극하는 것이다. 말초혈관이 닿는 곳, 그곳은 우리 몸과 외부 세계의 경계다. 말초혈관으로 혈액 순환이 활발해지면 몸의 경계에서 감각이 깨어난다. 눈, 코, 입, 귀, 그리고 온몸을 뒤덮고 있는 피부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다.


둔해진 감각이 되살아나는 경험, 이런 경험을 가끔 한다. 심한 몸살감기로 끙끙 앓다가 회복될 때. 아플 때는 뭘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고, 몸에 이불만 닿아도 아프고 짜증이 난다. 그러다 몸이 점차 나아지면서 입맛이 돌기 시작한다. 평소에 질리게 먹던 것도 그때는 꿀맛이다. 뭘 해도 몸이 가볍다. 마냥 신이 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몸살로 된통 아프다 살아날 때의 그 느낌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 느낌을 좋아한다. 그래서 가끔은 몸살이 한번 났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좀 이상한 게 아닐까 싶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만의 비밀.

그런데 자스민 오일이 가져다주는 게 이런 느낌인 것 같다. 혓바닥에 거친 천을 하나 덧대놓았다가 걷어냈을 때의 느낌 같은 것. 몸과 세상의 경계에서 감각이 되살아나면 된통 아프고 난 다음에 식욕이 당기듯 세상에 대한 식욕이 당긴다. 몸과 세상이 만나는 매 순간에 대한 식욕이 솟구친다. 손과 발이 따뜻해지면서 감촉이 살아난다. 세상을 만지고 다양한 감촉을 느끼는 게 재미있어진다. 재미있어질 때 그때가 바로 현재, 그 순간에 오롯이 존재하게 되는 때인 것 같다. 아무리 걱정이 많은 사람도, 과거에 대한 회환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가득 찬 사람도 재미있는 일 앞에서는 과거나 미래로 가지 못한다. 오롯이 재미있는 그 순간에 빠져들게 된다. 아니라고 말할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재미있는 일 앞에서는 딴 데 정신을 팔 재간이 없다. 그 재미를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나의 욕망이 나를 꽉 붙잡는데 어딜 갈 수 있겠는가.


자스민 오일이 몸에 스며드는 순간 만나는 게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예뻐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언젠가 느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남편 같은 그런 존재라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그 사람의 예쁨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되살아난 오감이 까먹은 기억을 되찾아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쉽게도 그날 자스민 오일이 몸에 스며들 때 내 눈 앞에는 남편 말고 노트북이 있었다.


현재에 집중한다는 건 과거와 미래로 흩어진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으는 것이기도 하다. 한 사람일 때보다 합체했을 때 더 힘이 세지는 또봇처럼 분산된 에너지를 현재라는 한 순간으로 모으면 평소보다 더 큰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된다. 그 에너지로 우리는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몰입 상태에서 뇌는 도파민과 엔도르핀, 아난다마이드 anandamide를 분비한다. 이들은 만족과 희열, 행복감을 선사하는 호르몬이다. 파랑새 이야기처럼 결국 행복은 어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현재, 바로 이 순간에 있는 것이라고 자스민이 말해주는 것 같다.


자스민은 사랑의 묘약이 맞다.

현재라는 순간과 사랑에 빠지게 하는 묘한 오일!


저녁 무렵 찌뿌둥하다고 투덜대는 남편에게 아로마 인사이트 카드를 뽑아보라고 했더니 자스민 카드를 뽑았다.

"나이 들어서 이제 혈액순환이 잘 안되나 봐~"

한마디 툭 던지고 마사지를 해줬다. 그를 마사지해주던 내 손으로 스며든 자스민이 지금 나를 노트북 앞에 앉혀놓은 것일까? 이 시간에 잠도 안 자고 이러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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