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컬러로 감정을 만나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감정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모으고 있다. 이런저런 감정들을 가볍게 지나오다 '쉼'이라는 단어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발~ 너 뭐하니? 안가?'
마음속으로 아무리 나의 발에게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거대한 껌딱지라도 밟은 거야? 왜 이래?'
마음의 발은 여전히 그 단어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가 내 발의 마음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에게 물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좀 쉬라고 말하면 기분이 어때?"
막연한 질문이었는지 답이 없길래 '누구'를 구체화해서 물어보았다.
"내가 당신한테 좀 쉬라고 말하면 기분이 어때?"
"기분 좋지~ 내가 힘든 거 알아주는 거잖아."
"그럼 첫째 딸이 이렇게 말하면?"
"그건 더 기분 좋지. 이 녀석 다 컸구나 싶으니까."
"만약에 당신 친구 중에 ***이 이 말을 하면?"
"너 나 잘하라고 말하겠지? 음, 그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고 상상하니 좀 기분이 언짢아지려고 해. 지가 뭔데!"
아~ 이거였구나!
기억이 존재하는 내 인생 속에서 나에게 쉬라는 말은 많은 순간 반항심과 저항감을 불러왔다. 어렸을 때는 무언가에 열중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있는데 '이제 그만 좀 쉬라'며 놀이를 중단시키는 엄마에게 짜증이 났다. 사춘기 시절에는 시험 범위까지 공부를 다 못해서 마음이 쪼그라드는데 공부 좀 그만하고 쉬라는 아빠의 말에 나가라고 소리치며 방문을 꽝 닫아버렸다. 보건교사로 학교에 들어가서는 "선생님~ 좀 쉬어도 돼요. 보건교사가 무슨 일을 이렇게 많이 하려고 해요."라고 말하는 선생님들에게 화가 났다.
그냥 좀 쉬라는 건데, 분명 다 나를 걱정하며 한 말들인데 유독 그 말을 들을 때면 내 마음은 꽈배기 공장을 가동한다.
왜? 도대체 왜?
그의 대답에 답이 있었다. 쉬라는 말을 하는 주체와 상황에 따라 꽈배기 공장은 돌아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다. 무언가를 해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 그 애씀을 공감하고 인정해주는 사람이 쉬라고 말하면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 앞을 막아선 장벽을 어떻게든 넘어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데 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난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내가 넘고 싶어 애쓰는 그 장벽 너머에 있는 이라면 분노가 인다.
'나보고 지금 이 장벽 뒤에서 그냥 살라고? 당신은 그 장벽 너머에 있으면서? 저 사람들은 이미 장벽 너머에 있잖아!'
오늘 아침에 뽑은 아로마 인사이트 카드가 라벤더였다. 라벤더는 쉬지 못하는 나에게 '좀 쉬어'라고 말을 건네는 향기다.
'이제는 카드마저 나보고 쉬라는 거야?'
어제의 일을 인사이트 카드는 알고 있는 걸까? 쉬라는 말에 배배 꼬인 내 마음을 풀어주고 싶은 걸까? 그동안 수없이 꽈배기 공장을 돌리면서 많은 일들을 해내기도 했지만 몸에게는 몹쓸 짓도 많이 했다. 휴무 없이 퇴근도 없이 몇 날 며칠 풀가동하는 꽈배기 공장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졌다.
쉬어 = 포기해
언제인지 모르게 마음속에 만들어진 이 공식을 이제는 좀 수정해야 내 몸이 살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될까?
쉬라고 말하는 사람의 시커먼 속내가 뻔히 보일 때는 그냥 감정이 올라오는 대로 인정해주면 된다. 화가 나면 화를 내도 된다. 짜증이 나면 짜증 옆에 앉아서 수다를 떨어도 된다.
쉬라고 말하는 사람은 진심인데 내 마음이 꽈배기 공장을 돌리고 있다면 공장을 멈추면 된다. 이게 쉽지 않은 게 문제인 거지. 자발적으로 기계를 끄지 않는다면 기계가 돌아가는데 필요한 연료를 차단해버리면 된다. 꽈배기 공장을 가동하는 연료가 무엇인지 알아내면 이 일은 생각보다 간단해진다. 다행히 최근에 나는 이 공장의 주연료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건 바로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어찌나 지독한 마음인지 작별을 고해도 딱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작별하는 것은 포기했다. 대신 이놈이 나타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촉을 세운다. 자기가 나타났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거나 모른 척하면 꽈배기 공장으로 유유히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