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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Dec 16. 2021

월급이 사라진 삶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그렇게 황당한 것만은 아닌 일상

월급이 없는 삶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직업군인이아빠는 퇴직하실 때까지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받으셨다. 운이 좋아(?) 지금보다 실업률이 훨씬 낮았던 시대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바로 월급을 받는 게 당연한 삶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30대까지 나의 삶에서 월급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주변에 사업을 하는 부모님을 둔 친구들을 보면 신기했다. 개인 사업장을 가진 사람을 막연하게 선망하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 저런 삶을 살 수 있을까 핑크빛 꿈을 꿔보기도 했다.


그렇게 당연한 존재이던 월급이 족쇄처럼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퇴사를 꿈꾸게 되었다.

'뭘 해도 이 만큼을 못 벌겠어?'

호기로운 생각은 잠시 뿐, 소박한 월급일지라도 다음 달부터 당장 이 돈이 끊긴다고 생각하면 숨이 탁 막혔다. 상상만 해도 이렇게 두려운데 월급쟁이 인생을 진짜 떼려 칠 수 있을까? 첫 직장에서 퇴사를 할 때는 기세 등등했다. 아직 젊었으니까. 하지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퇴사는 기분 좋은 상상일 뿐 꺼내기에는 무서운 말이었다. 나이만큼 늘어나는 카드값과 부동산 대출도 내 발목을 잡았다.


소비에 발목 잡혀 질질 끌려가던 나의 꿈을 실현시켜준 건 우습게도 공황장애였다.

"너 정말 이럴 거야? 월급에 목매달고 살다 숨 막혀 죽겠어!"

퇴근길, 지하철이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숨이 탁 막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다행히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부축을 받아 지하철에서 내려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에도 흉통으로 동네 의원에서 심전도와 초음파 검사를 받았던 터라 이번에는 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 간단한 검사와 문진 끝에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공황장애'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사표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만두지는 못해도 병가는 낼 수 있으니 이건 횡재라고 생각했다. 2년 여의 시간,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고 잠을 자는 게 전부인 날들이었다. 처음에는 두려웠다.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아서. 하지만 긴 잠은 그 두려움도 꿀꺽 삼켜버렸다. 두려움이 작동을 멈추자 회복된 몸을 다시 월급쟁이의 일상으로 데리고 가기 싫어졌다. 그렇게 긴 세월 상상만 해도 두려워하던 일을 단숨에 저질러버렸다. 퇴사.

그 말을 내뱉으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아주 잠깐만.

시간이 지나면서 긴 잠이 삼켰던 두려움이 다시 뱃속에서 기어올라왔다.

"내가 다 소화되어서 없어져 버린 줄 알았지? 내가 얼마나 질긴 놈인데!"


최소한 월급 실수령액만큼은 돈을 벌 수 있는 걸 찾아야 했다.  이것저것 배우고 시도해보면서 그나마 통장에 있던 잔고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 내 상태는 상상했던 것에 비해 꽤 괜찮았다. 오히려 공황발작이 습격하는 횟수가 줄었다. 혼자가 아니어서였을 수도 있다. 긴 잠 속으로 숨어들었을 때도,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여전히 헛발질하는 동안에도 내 곁에는 그가 있었으니까.

'만약 오롯이 혼자였다면 내가 과연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종종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이 싫었다. 자기 인생은 전적으로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사실은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을 품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긴 잠이 몸과 마음을 옥죄던 틀을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린 걸까? 지금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냥 인정하게 되는 걸.

좀 기대도 된다고 나를 허용하고 나니 행동하기 전에 재고 따지던 시간이 더 짧아졌다. 일단 해보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방향으로 일상을 꾸려나가다 보니 오히려 자신감이라는 근육이 마음에 조금씩 붙기 시작한다. 메아리도 없는 산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줄 알았는데 어디선가 메아리가 들려온다. 생각보다 시차가 길었을 뿐, 이곳은 메아리가 없는 산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돈을 버나, 경력 단절을 극복하고 어떻게 직업을 구해야 하나 막막해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일상을 함께 하는 친구들, 지인들, 가족들 속에서 이런 고민을 만날 때마다 월급 없는 삶은 상상도 못 하던 나를 만난다. 물론 지금 나의 돈벌이는 소박했던 월급보다 더 소박하지만, 나의 가치에 대한 보상을 획득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해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삶이 생각보다 괜찮다. 상상했던 것만큼 힘들거나 막막하지도 않다. 이런 나의 도전을 그들에게 공유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진다. 그래서 월급 없는 삶을 일궈나가는 나의 일상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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