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시간 속의 침묵
흐린 하늘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빛내림.
바닷물 위의 반짝이는 윤슬.
해변에 널브러진 해묵은 닻들.
잔잔한 파도가 밀려와 세월의 무게만큼
새빨갛게 녹을 뒤집어쓴 닻과 닻 사이에서
하얀 포말이 속삭이고 있다.
오랜 세월 모래에 박힌 채 철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닻.
한때는 항로를 지키던 무게였을 것이고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묵묵히 바다의 밑바닥을 붙들었던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의 배도 붙잡지 못하고
녹슨 팔을 벌린 채 고요 속에 잠겨 있다.
인간의 삶도 그렇다.
우리는 한때 누군가의 필요한 닻이 된다.
관계를 묶고, 시간을 붙잡고,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도 쓰임을 다해,
모래 위의 닻처럼
정지된 시간 속에 서 있게 되리라.
그렇다고 허무만이 남는 것은 아니다.
닻이 박힌 자리에 바다가 머물 듯이
정지된 듯 보이는 순간도 사실은
흐르는 시간의 일부이다.
삶의 닻 또한 그렇다.
우리가 붙잡지 못하는 순간들,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날들조차,
결국은 우리 존재의 해안선을 그려내는
파도의 일부이다.
닻이 바다를 기억하듯,
우리는 멈춤 속에서 삶을 증언한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파도가 닻을 삼키듯,
시간은 우리를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바람에 스친 흔적과
파도가 속삭이는 이야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