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 차, 감정을 감각으로 번역하기 과제/불안
은정이는 정모 준비를 위해 대형마트에 갔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매장은 눈에 띄게 한산했다. 매장 한편에서 소시지 굽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천장에서 흘러나오는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바닥을 타고 발끝까지 스며들었다. 그 울림에 맞춰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메모해 둔 물건을 하나씩 카트에 담았다. 쌈 채소의 차가운 숨결이 손바닥을 스쳤고, 감 상자는 들자마자 묵직하게 손목을 눌렀다. 회원들과 음식을 나눌 생각을 하니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주차장으로 내려가 상자 세 개를 들어 트렁크에 실을 때, 호흡을 가다듬고 단전에 힘을 팍 주었다. 시동을 걸기 전, 잠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빨갛게 솟구친 주가 그래프가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모처럼 은정이의 마음이 붕 떠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그때였다. 지지직. 전기 스파크가 멀리서 튀는 듯한 소리가 귓바퀴를 스쳤다. 오른쪽에 주차 돼 있던 차량을 살짝 스친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더 차를 앞으로 뺐어야 되는데 핸들을 2초 정도 일찍 돌린 탓이었다. 주차장을 비추는 눈알처럼 생긴 CCTV를 떠올리니 등허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즉시 내려 확인했어야 했지만 몸이 먼저 피했다. '긁힌 자국 살짝 났을 건데 뭐',라는 생각으로 도망치듯이 주차장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저혈당이 온 듯이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갔다. 어깨가 푹 꺼진 듯했고, 운전대를 잡은 손에서 떨림이 감지되었다. 엑셀에 올려 둔 오른쪽 다리가 모래주머니를 매달아 놓은 듯 무거웠다. 등줄기에서 얼음을 끼얹은 듯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차 안은 숨 막힐 만큼 조용했다. 대본을 독백하듯이 '운전을 어떻게 한 거야(…) 정신을 어디에 둔 거냐고? (…)' 바짝 마른입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바꾸고 오른손으로 살며시 쥐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쿵쾅, 쿵쾅, 쿵쾅." 심장이 밖으로 삐져나온 듯했다. 얼굴에 화기가 느껴졌다. 마치 한여름에 난롯불 앞에 선 듯이 볼이 후끈 달아올랐다. 신호등 앞에서 멈췄을 때 혹시나 해서 떨리는 손으로 문자를 확인해 보았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은정이는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기어코, 주차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 차 범퍼에는 스친 자국이 희미하게 보였다. 은정이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받힌 차 앞으로 살금살금 가 보았다. 흰색 아반떼 차량이었다. 다행히 받친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휴."
그때 마트에서 장을 보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젊은 여자가 내 쪽을 흘깃 보았다. 은정이는 괜히 트렁크를 열어 짐을 정리하는 척했다. 차를 손상시키지는 않았지만 은정이는 3년 전 일이 떠올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낮 두 시경 약간 경사로에서 신호대기 중이었다. 오늘은 코로나 양성자 수가 몇 명이나 되나 궁금하여 은정이가 검색을 하는 사이 차가 살짝 뒤로 밀렸다.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발에 힘이 빠졌던 모양이다. 뒤차가 경적을 울리는 바람에 놀랄 새도 없이 브레이크를 밟으니 20미터 지점에서 차가 딱 멈춰 섰다.
깜빡이는 불빛 사이로, 앙상한 남자가 후다닥 튀어나왔다. 은정이는 얼른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과를 했다. 사과 따위 안중에도 없는 그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차량 앞범퍼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돋보기가 있었다면 그것을 이용하여서라도 흠집을 잡아내고 싶었는지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를 반복하더니
"에잇 C, 흠집을 발견해야 되는데, 왜 안 보이지?"
보험 처리도, 현금 해결도 불가능한 상황에 대실망을 하던 그 남자. 매의 눈으로도 찾지 못한 흠집도 있는 거라면서 내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마지못해 차에 오르던 그 남자. 나쁜 남자는 분명 아닐 진데, 그는 왜 그렇게밖에 처신을 못했을까? 누군가한테 당한 경험이 있었던 걸까?
그 남자가 남긴 여파 때문인지, 작은 바람 소리에도 은정이는 어깨가 움찔했다. 집 앞에 도착했지만, 트렁크에 있는 물건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동을 끄고도 한참이니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과제물로 짧은 순간의 감각을 기록해 보았다. 불안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리는 감각이다. 아주 작은 소리 하나가 평범한 하루의 리듬을 무너뜨릴 때, 그때의 긴장은 오래도록 몸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