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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길

ㅡ사진 보고 묘사하기

by 가을산

나무들이 죽 늘어서 있다. 은행나무다. 양쪽에 도열하여 열병식을 하는 것 같다. 나무마다 노란 은행잎을 넘치도록 이고 있다. 가을이다.

앞에 있는 나무의 잎들은 노란빛이 선명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흐리다. 그런데 맨 뒤쪽의 나뭇잎은 노란 등불을 켜놓은 것처럼 샛노랗고 환하다. 거기가 트인 곳이라 햇빛이 막히지 않고 쏟아 부어져서인가 보다. 빛이 있고 없음에 따라 색도 느낌도 다르다.


사진 속에는 미술 시간에 배운 원근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앞은 넓고 뒤로 갈수록 좁아지는 삼각형 구도. 나무 위를 채운 바탕색인 하늘도 그렇다. 앞쪽은 넓은데 멀리 갈수록 좁아진다. 색도 앞쪽 하늘은 파란데 갈수록 옅어져 끝부분은 아주 연한 회색이 다. 순서대로 놓인 그림물감 같다.


나무마다 위로, 옆으로 뻗어 나간 마지막 번째 잎들의 높이와 위치가 달라서 그 나머지를 채운 하늘의 가장자리는 구불구불하다. 하늘만 보면 앞에서 뒤로 강물이 흘러가는 것 같다. 강물의 끝은 아득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그 강물 끝에 이르면 뭐가 있을까? 가보면 알리라. 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보는 첫 부분처럼 다시 삼각형의 넓은 밑변이 되어 있음을. 소실점은 사라지고 그곳이 새로운 시작임을. 인생도 그런 것 같다. 많이 걸어온 것 같아도, 어딘가에 도달해도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기. 그걸 반복하며 사는 게 인생 아닐까?

화가가 몇 달 동안 죽을힘을 다해 그림을 완성한 뒤에도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리려고 붓을 잡고 작가가 탈고하자마자 새 작품을 구상하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을 꾸리는 사람도 하던 일을 하고 또 하며 산다. 그게 작은 일이라고 해서, 위대한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하찮은 건 아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좋아서 한다면 그 삶도 위대해질 수 있다. 위대한 일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지만 꾸준히 반복하는 행위가 그걸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쉬지 않고 손가락을 놀려 글자를 만들어내는 일처럼.

샛노란 은행잎을 본다. 저렇게 노랗게 물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햇빛과 비와 바람이 필요했을까? 양분도. 주기적으로 물뿌리개를 들고 가 물을 주지도, 햇볕을 잘 쬐도록 해주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많은 잎이 나서 자라고 계절에 맞춰 노랗게 물들어 눈을 즐겁게 해주니 고맙고도 염치가 없는 것 같다. 놀이공원에 공짜로 입장한 것처럼.


올려다보니 한 나무에도 정말 많은 은행잎이 달려 있다. 글자 그대로 무수하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수백 개는 달렸을 테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오백 년 된 은행나무라면 몇천 개일지 모른다. 오늘처럼 따뜻한 날 나무에 올라가 한번 세어보고 싶다. 그냥 올라가기는 어렵겠지.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잎을 세고 있으면 사람들이 은행털이범이라고 신고하려나?

튼튼해 보이는 나뭇가지를 골라 앉아 한 장 한 장 은행잎을 세다 보면 한나절이 아니, 하루라는 장이 금세 한 장 넘어가겠지. 한 해 삼백육십오 일이나 되는 많은 날 중에 그렇게 넘어가는 한 장이 있으면 어떠랴. 같이 세어볼 사람이 있어도 좋고 혼자 세어도 좋으리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추억과.. 하듯 잎 하나에 추억과, 잎 하나에 사랑과.. 슬픔과 아픔이라는 이름도 붙여주며.

나무 옆 자전거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차림이 가벼운 거로 보아 운동 삼아 타는 것 같다.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어릴 때 배우지 않으면 어려운 것 같다. 나이 들어 잘못 넘어지면 크게 다친다고, 배우다 다쳐서 오래 고생했다는 또래들의 이야기를 자꾸 듣다 보니 의욕도 사라졌다. 이젠 남편도 말린다. 뒤에서 받쳐주기 너무 힘들다고. 이번 생에 못 하는 일 하나 추가.

못하는 게 많다. 수영도 못한다. 수영이 그렇게 좋은 운동이라는데 물속에 들어가는 것부터 싫다. 옷 벗고 갈아입기나 따뜻하지 않은(바닷물일 경우 차가운) 물에 들어가 떨기, 끝난 뒤 씻고 머리 말리고 하는 일이 다 싫은 데다 운동 신경이 없어 배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주에 물이 많아 수영이 나에게 그리 좋은 운동이 아니라는 말이 수영 면제, 로 들려 얼마나 기쁘던지.

바다에 누워 하늘 보기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여름의 늦은 저녁, 해가 져 자외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때 네모난 튜브 위에 누워 하늘의 별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더 일찍 시도했으면 좋았을 일, 얼마나 많은지. 하지 않아 후회되는 일, 얼마나 많은지. 그 시간에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했을지도 몰라, 애써 위로한다.

길 양쪽의 은행나무 가로수 사이로 여러 모습의 사람들이 오간다. 맨 앞에 알록달록하나 전체적으로는 푸른 빛인 배낭을 멘 여자가 보인다. 연분홍색으로 보이는 리본을 뒤로 묶은 머리에 달았다. 다리가 쪽 고르고 자세가 반듯하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일까? 어떤 일인가를 하러 이제 근무처로 가는 것일까? 회색 운동복을 입은 사람도 보인다. 공원을 뛰고 가는 건지.

길가 관목 옆에 씽씽이 하나가 세워져 있다. 누군가 타고 둔 모양이다. 공원 입구도 아니고 버스 정류장도 아닌데 왜 저기에 두었을까? 건널목 앞도 아닌데 저기에 버릴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바로 저 자리에서 친구를 만나 그냥 그건 저기 두고 공원이든 찻집이든 어딘가로 가버렸을까?


나무마다 수북하게 달린 은행잎을 본다. 노란 은행잎은 황금보다 값지다. 황금은 사시사철 있지만 저 노란 은행잎은 딱 이 계절이 아니면 절대 볼 수 없으니까. 임금님도 대통령도 간절히 원하면 만날 방법이 있겠지만 나무에 달린 노란 은행잎은 지금이 아니면 어떤 수를 써도, 어떤 뇌물을 주어도 못 만난다. 귀하고 귀한 노란 은행잎이요 지금 이 순간이다.

젊은이들은 알 수 없을 테다. 온 세상이 벚꽃으로 가득할 때 내년에도 이 벚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사람의 마음을.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내년 가을에도 지상에 존재해서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드니 더욱 이 노란 은행잎이 귀하게 여겨져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잎마저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잎들을 들여다본다. 한 나무에 났으니 가족이기도 하고 나무를 한 세상이라 보면 친구나 동료라고도 할 수 있는 잎들. 찬란한 황금빛을 자랑하는 나무 위에 있는 은행잎들도 언젠가는 이처럼 가족이나 동료가 먼저 떨어진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어떤 나무에 어떤 잎으로 소속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머잖아 우리도 그곳에서 떨어질 것이다. 은행나무든 벚나무든 참나무에서든 필연적으로 떨어져 바닥에 뒹굴 것이다. 그렇기 전에, 나뭇가지의 실낱같은 줄기에 달렸어도 햇빛을 받으면 있는 힘껏 반짝이고 순한 바람에는 살랑살랑 몸을 흔들어봐야지. 잎이 다 떨어져 나뭇가지가 텅 비어버리는 겨울이 오기 전에 이 시절을 마음껏 누려야겠다. 알찬 열매를 수확하지 못한다 해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더 많이 해보아야겠다.


나무 아래 무릎 높이 정도로 자라 있는 풀은 억새일까? 아직 덜 자라서 키가 작은지. 억새 종류인 건 확실해 보인다. 억새는 가을 풍경을 이루는 필수 요소다. 억새 없는 가을은 뭔가 빠진 듯 허전하다.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노래에 나오는 으악새가 당연히 새 이름인 줄 알았다가 억새를 가리키는 말이라 하여 머쓱했던 기억이 난다. 으악새 즉 억새가 바람에 온몸을 흔들며 슬프게 울어야 가을이다.

흙색과 비슷한 억새가 있어서 그 위에 있는 은행잎의 노란 색이 더 선명해 보인다. 억새 같은 배경이 되어주는 인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니 좋을 것 같다. 배경 음악 없는 공포 영화는 무섭지도 않고,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도 적절한 음악이나 배경이 없으면 재미도 없다. 배경은 중요하다. 부모라는 배경, 배우자라는 배경, 자라고 사는 동네라는 배경. 다닌 학교, 어울리는 친구 등 배경이 되는 요소는 많고 우리는 배경 속에서 일상을 영위한다. 누군가에게 잘 어울리는,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좋은 배경이 되고 싶다.


가을 사진을 보니 내 필명인 가을산이 떠오른다. 필명 짓기가 쉽지 않았다. 본명이 멋있다면 그냥 쓰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에 또 아버지를 원망했다. 흔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식 이름을 성의 없이 지었다고 늘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그런데 이름을 마음대로 지어 보래도 안 되자 아버지께 짓느라 고생하셨다고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고민 끝에, 명리학 공부로 내 물상이 가을 산에 가까움을 알고 있던 터라 그렇게 정해버렸다. 한 계절로 한정하는 게 걸리고 어느 정도 쓸쓸한 기운이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오색 찬란한 풍요로운 가을 산을 그리며.

가을 산의 화사한 단풍처럼 나도 물들고 싶다. 무슨 색으로든. 그런데 아직 아무 물도 못 든 듯하다. 아직도 여름인 줄 아는지. 철도 모르고 사네. 이름값도 못 하고. 이름에 걸맞게 화사하고 풍성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양쪽 길가로 낙엽을 잘 쓸어놓아 사람들이 걷는 가운데 길바닥에는 떨어진 잎이 별로 없다. 왼쪽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도로에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멈춤 신호에 걸려 서 있다. 무성한 은행잎에 조금 가려진, 가수의 연주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보인다. 사진 가운데 노란 은행잎들 위에 있는 파란 바탕의 표지판은 옥에 티다. 왼쪽은 자전거 길, 오른쪽은 보도라고 표시되어 있다. ‘가을’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어도 보기 싫을 곳에 저런 걸 달다니. 바닥에 표시해 두면 좋을 텐데.


바퀴를 굴리며 가는 사람, 배낭을 메고 가는 사람, 그냥 걸어가는 사람은 저쪽 하늘로, 손가방을 들거나 윗옷을 팔에 걸치고 오는 사람은 이쪽 하늘로 모두 하늘의 끝, 강의 끝을 향해 간다. 어딘가에 닿기 위해서.


사열하는 나무 병사들 사이로 나도 걷는다. 끝까지 가려는 마음으로. 끝은 어디인가? 알 수 없다. 끝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끝이 올 때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걷는 일. 오늘도 꾸준히 걸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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