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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음 Mieum Jan 31. 2022

10. 장래디를 닮아 떠오른 친구 이야기

<보건교사 안은영>의 캐릭터, 장래디를 닮은 친구가 있었다. 



0.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봤다. 의외로 생각의 타래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중 ‘장래디’라는 캐릭터가 있다. 보는데 계속 이상하게 낯이 익은 느낌이 들었다. 누굴 닮았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있었나? 연예인이었나?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드라마를 계속 보는데 퍼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2017년 2월이었으니 벌써 4년 가까이 지났네. 2030 페미니스트 캠프에 참여했을 때 알게 된 친구가 있었다. 캠프가 끝나고 그냥 끝난 인연들도 많았지만, 이 친구와는 그 뒤로 꽤 인연이 오래 갔었다. 이후 비건지향하는 페미니스트들끼리 따로 모임을 만들어 비건 공부를 했었고 비건여행도 갔으며 따로 여러 번 만나 놀기도 했던. 게다가 요즘 같은 세상에 ‘얼굴 보고 만나야만’ 만나는 건가. 지역적으로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친구였지만 SNS로도 서로 어떻게 사는지, 어떤 이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끔은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가끔은 서로를 공감하며 다독이는 그런 사이였다. 우리가 처음 알게 된 페미 캠프는 연령주의를 탈피하고자 하던 모임이었어서 정확한 나이를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동갑내기여서 더욱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러다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 연락이 뜸해졌고, 어느새 과거의 한 켠으로 잊혀져 ‘난 그런 친구가 있지’에서 ‘그런 지인이 있었지’로 넘어가려던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생각난 김에 ‘잘 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의 SNS를 타고 들어갔다. 내가 자주 접속하는 SNS채널도 아니라서, 그가 자주 하는 이 SNS에서 소식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몇 달 전에 문득 어떤 소식을 봤던 것 같긴 한데… 보던 드라마에서 닮은 배우가 나와 생각난 김에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이 궁금했다. SNS로 알게 된 근황, 그는 산달을 앞두고 있었다. 




1.  


 3~4년 전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의 조각은 원래 그렇듯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친구는 나와 페미니즘적 주파수가 잘 맞는 사람이었다. 나는 애인을 만들거나 친구를 만들 때 항상 이 ‘주파수(frequency)’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게 정확한 비유는 아닌 것이, 인권감수성이나 페미니즘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양 끝단의 스펙트럼처럼 그 어디쯤, 사이라고 좌표를 찍어 말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도 어떤 말인지 알지 않은가? 어떠한 낯선 사람이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힌다고 해서 이제는 완전히 “와! 나랑 같은 사람이네!” 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핀트가 팅, 나가는 것 같은 그런 대화. 그런 순간이 거의 없는, 그리고 발전적인 사고방식을 지녀서 서로 다르더라도 쉽게 주파수가 맞춰져 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나는 ‘페미니즘적 주파수’가 잘 맞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친구는 나와 페미니즘적 주파수가 잘 맞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함께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마음이 잘 맞았다. 친구는 본인을 비혼주의라고 밝힌 적은 없었지만, 남자인 애인을 만나면 이러이러한 경우들 때문에 점점 더 페미니즘을 알아가면 갈수록 사랑을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했다. (남성애 성지향성과 별개로 페미니즘적인 사고방식에 있어서 남성과의 연애가 어려운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나는 이 친구가 사랑을 할 때면 정말 모든 마음을 다 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점도 멋져 보였던 기억이 난다. 친구는 글도 잘 썼고,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글이나 그림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비건 실천을 해도, 페미니즘적 실천을 해도, 글을 쓰더라도,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뭘 하더라도 항상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2. 


 나는 사실 이 사회에서 어떤 순간에는 ‘비혼주의자’가 되기도 했다가, 어떤 순간에는 ‘불가혼자’가 되기도 한다. (보통 내가 퀴어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비혼주의자라고 대충 대답한다.) 그러나 어떤 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나의 성적지향성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내가 만약 남성 애인과 만나는 사람이라 가정하면 나는 비혼주의자로 살 것이지만, 여성 애인이 있다면 나는 결혼하고 싶지만 법적으로 서류를 제출할 수 조차 없는 불가혼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쨌든 이 사회에서 흔히 20대 후반~30대 여성에게 강요되는 통상적 의미의 ‘결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리고 보통 비혼을 결심한 2030대 여성들은 미래를 상상하기가 어렵기에, 종종 불안하다. 주변에서 너무 쉽게 종용하지 않는가, “나중에 늙어서 외롭다”고. 남들 다 하는 결혼은 하라고. 나중에 후회한다고. 친구들과 가끔 반농담삼아 ‘나중에 비혼주택을 만들자’, ‘비혼여성들끼리 함께 살자’며 이야기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을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40대, 50대, 60대 이후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도 “몇 살이면 뭘 해야 하고, 나이에 그런게 어딨어!”를 외치던 어린이였고, 20대 중반부터는 ‘연령’이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 특히 여성에게 어떠한 편견과 영향력과 강압을 동반하는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연령주의(Ageism)를 탈피하여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내가 나이로부터 영원히 자유롭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가고 싶은 속도대로, 원하는 나이에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흔히 29살 여성에게 ‘아홉수’라 부르며, 30대가 되면 이젠 완전 젊은 여성으로서 가치를 잃는 것이니 마지막 20대를 꼭 엄청나게 보내야 한다는 듯한 말들을 보고 들으며 자랐지만, 나는 연령주의를 탈피하여 사는 사람이니, 내가 29살이 되더라도 그런 ‘나이규범(age roles)’과 압박들로부터 자유로울 줄 알았다는 거다. 


 그리고 스물아홉살이 되었다. 주변에 결혼을 하거나 출산을 하는 또래 친구들이 별로 없어 그랬던걸까, 나는 내 속도대로, 내 방식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남들이 결혼하더라도 그건 나랑 상관 없는 이야기고, 나는 (남성과) 결혼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로 했으니까. 마음이 맞는 여성 애인을 만난다면, 평생 우린 결혼한거라고 우리끼리 생각하고 살지 뭐. 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어쨌든 마음이 쉴 수 있는 안정적인 나만의 공동체, 나만의 가족을 만들고는 싶었다. 하지만 전애인이 말했듯, 우리는 어떠한 법적 테두리 안에 있지 않아서 같이 살더라도 항상 불안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떠밀리듯 남성과 결혼을 하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안정적인 피터팬’으로 살고 싶었던 거다. 아무도 날 구속할 수 없고 나이라는 역할규범에 갇히지 않은채, 내 친구들도 나와 같았으면 좋겠는 그런 마음.  

하지만, 정작 마침 나와 동갑인 이 친구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사진을 봤는데, 시각적인 부분 때문에 더 ‘임신했구나’ 라는 사실이 와닿았던 것 같다.) 곧 아기를 낳는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이상하게 마음이 한참을 싱숭생숭했다. 난 무엇 때문에 싱숭생숭했던걸까? 혹시 난 이런 스물아홉으로 사는게 나도 모르게 불안했던 건가? 



3. 


 나는 임신이나 결혼 이런 논제를 다룰 때면 두 명으로 갈라지는 기분이다. 퀴어인 나와, 페미니스트인 나. 한편 후자인 부분은 젠더이슈를 공부하며 여성주의적 사고를 하다보니 시스헤테로남성과 연애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 느껴져 포기한 지 오래다. (마음도 가지 않고, 그냥 친구로서의 평범한 대화에서도 그 발화자가 남성이라면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이 늘었고, 아무튼 힘들다.) 하지만 나 역시 이 친구처럼 ‘사랑을 열정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럼 만약 내가 헤테로 여성이였다면 나는 사랑을 포기했을까, 페미니즘을 포기했을까? 아니, 하긴 남성을 사랑하는 일이 페미니즘을 포기하는 거라고 볼 수는 없다. 남성과의 사랑이 곧 안티페미적인 짓은 아니다. 상대방 남성이 성역할규범적인 발화나 행동을 했을 때 남들보다 더 구체적으로 불편하게 느낄 뿐이지. 하지만 경험상 정말 어려운 일이긴 하다. 여성애가 남성애의 ‘대안’이라는 말이 절대 아니라, 나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남자 말고도 천지에 널린 사람이기 때문에 더 쉽게 남성애에서 오는 불편함을 생각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이 사회에서 퀴어로 사는 것이 더 편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단순하게 내가 여성애적 부분이 더 커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선택지가 있었다는 뜻인데. 


 이 친구와 놀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아무래도 헤테로 친구기에 종종 ‘후자인 나’가 나와서 대화를 하곤 했다. 남자들이랑 연애하면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기 쉽고, 남자들은 어쩌고 저쩌고. 그 서로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그냥 어쩌면 나는 혼자서 상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친구와 나이 4050대에도 우린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웃기는 생각이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와 같이 살며 가족을 꾸리고 싶다 생각해놓고, 이 친구는 싱글이기를 바랐다는 뜻인가? 어이 없게도 상상 속에서 나는 싱글이 아니었다.  


 겁이 종종 났다. 우리보다 10년, 20년 나이 많은 여성들이 얘기해준 것들이 기억나서. 


 “시집 가서 애 낳고 살다 보면, 싱글인 친구들이랑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안되지. 특히 시집 안 간 친구가 있다? 점점 공통분모가 줄어들고, 멀어지는 거지. 어쩔 수 없어 이건. 관심사나 생활 반경 자체가 달라지는 거거든.” 


 지금도 난 그래서 헤테로 친구들과 그리 친하게 지내지 않는가보다. 갑자기 어느 날 결혼해 버린다고 해도, 애기를 낳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들이니까. 나와는 점점 관심사, 생활 반경이 달라질 것이고 나는 너무 외로워져 버릴 수도 있으니까. (단순히 ‘달라지는’ 과정인데 그들이 외롭지 않고 내가 외로운 이유는, 사회적 구조 층위차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 친구는 나와 페미니즘 주파수가 잘 맞던 친구였으니까, 마음이 잘 맞았고 드립이 잘 맞았고 서로를 아끼는 지인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마음대로 상상했었나 보다.  




4. 


 친구는 임신 후에 몸상태가 많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혼인신고를 한 뒤 계획 하에 임신을 했고, 조금 더 고민하다 정말로 낳아서 키우기로 결정했다고 쓴 글의 부분에서는 나도 괜히 몰입되어 왈칵 눈물이 났다. 그리고 몇 개월동안 계속 친구는 컨디션이 좋지 않음을 호소했다. 왜 출산을 결정했다가도 몸 상태 때문에 임신을 중단하는지 이해가 간다고 쓰여진 부분도 있었다. 몇 개월 전에 읽었던 <임신일기>라는 책이 생각났다. 여성의 몸은 임신의 과정을 거치며 정말 많이 변하고 아프기도 한다는데. 친구가 그걸 겪고 있다. 그걸 겪으면서도 아기를 낳겠다고 버텨나가고 있다. 안쓰럽지만 친구를 위해 안쓰럽다고 여기지 않기로 했다. 친구는 멋있는 일을 하고 있다. 많이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출산하기를 바랐다.




5.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을 보고 이 친구가 생각난건 그냥 생각난게 아니었다. 보고싶었던 거다. 이제는 너무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예전처럼 장난치며 카톡으로 놀자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런 사이가 되었지만, 쉽게 말해 그냥 보고 싶었다. 함께 즐겁게 이야기 나누고 놀던 생각이 났던 거다. 같이 페미니즘 얘기도 비건 얘기도 하고, 웃고 싶었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었던 거다. 


 나와 동갑인 이 친구가 결혼을 하고,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필요 이상으로 놀라고 싱숭생숭 했던 건 다름 아닌 '축하하는 마음'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 불확신성이 아니라. 그런데 주변에 이렇게 출산을 앞둔, 내게 소중한 기억의 사람이 있었던 적이 없어서 그냥 이 감정에 놀랐던 것 뿐이었다. 난 지금 내 속도대로 내 방향대로, 알아서 잘 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친구가 밉지도, 부럽지도, 질투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일직선으로 보이던 선이, 가만히 보니 아주 작은 Y자 모양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그런 느낌. 이 Y의 두 갈래 길은 점점 더 멀어질 수도, 멀어지지 않은 채 다시 일직선으로 평행을 그리며 나란히 이어질 수도 있겠지. 우리는 조금 갈라져 나온 작은 두개의 길이다. 삶을 바라보는 눈, 마음, 그런 것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난 게 아니다. 새로운 일상과 정체성,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될, 친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친구는 정말 좋은 엄마가 될 것임을 안다.  

엄마가 된게, 이 친구라서 다행이다. 아이에게 성평등한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려줄수 있는 멋진 엄마가 될 거란걸 잘 알기에 걱정이 되지 않는다. 가끔 주변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이 내 눈 앞에서 젠더규범적인 교육을 하거나 아이를 젠더롤대로 꾸며 놓은 모습을 봤을 때마다 내가 느낀 건 ‘당황’이 아니라 ‘당연한 불편함’이었던 것 같다. ‘아니 어떻게 애기한테 저렇게 성역할적인 교육을 할 수가 있어?!’ 가 아니라, ‘그럼 그렇지.’에 가까운 그런 조소.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아이를 키우면 그렇게 키우지 않을 거라는 걸 가만히 상상해보니 심장이 콩콩 뛴다. 너무 멋진 일이야.  


소식 보니 아이는 여자아이라는 것 같던데, 아이가 여자로서 태어나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내게,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야 할’ 당위성이 생긴 느낌이다. 성평등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지. 친구와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자주 볼 순 없겠지만 멀리서라도 항상 친구와 아이를 응원하는 든든한 이모가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교류가 많이 없던 사이가 되어 이런 말을 하기도 사실 조금 쑥쓰럽지만, 이상하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고 친구는 남성과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지만, 앞으로 만나더라도, 그리고 아이가 조금 더 자라더라도, 나와 생활 반경과 공통점이 적어졌다 하더라도 현실적인 여건에 치여 마음의 거리까지 멀어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내가 몇 년 전 우리의 4050대 모습을 상상했던 것과 같이 페미니즘 이야기와 비건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친구로 여전히 지내고 싶다. 건강하게 출산하고, 부디 몸도 마음도 항상 건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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