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하는 것을 강요하지 마라… 또 다른 여성혐오의 잣대
“넌 여자애가… 머리 좀 길러라.”
누군가 짧은 머리를 한 여성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이에 누군가는 "내가 왜 여자이기 때문에 머리를 길러야 해? 난 여자니까 머리 짧게 자를거야. 그딴 건 남자들이나 하라고 해.” 라고 대답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웃기지 마, 누구나 머리 길이는 젠더에 상관 없이 길거나 짧을 수 있어야 해.” 라고 대답했다.
오늘은 이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1980년대 한국에 처음 여성주의가 인식론적 사상으로 들어온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까지 여성주의를 공부하던 페미니스트들을 가리켜 “영 페미니스트(Young Feminist)”라고 부른다. (그 때 당시에는 21세기 초반에 활동하던 페미니스트들이 영Young한 페미니스트들이었다.) 그리고 2015년도 메갈리아 사건 이후로 한반도 전반에 다시 몰아친 온라인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리부트 페미니즘 물결이 생겼고, 10대부터 30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에 위치한 이들을 가리켜 이제는 “영영(Young young) 페미니스트”, 또는 손희정의 책 <페미니즘 리부트> 표현을 빌려 '리부트 페미니즘 이후의 페미니스트들' 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이렇게나 거국적으로 ‘페미니즘’의 개념과 언어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한지, 2020년 현재 우리는 막 6년차에 위치해 있다.
나 역시 2015년 5월, 메갈리아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페미니즘(여성주의)를 접했다. 만 23년 동안 여성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어떤 것이 성차별인지도 모르는 채 살았던 내게 페미니즘의 개념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으며, 당사자성과 교차성의 핵심을 깨닫기 위해 독서모임을 하고 공부를 하는 등의 길을 걸어왔다. 재미있게도, 시기와 이슈화 되는 사건들에 따라 영영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와 움직임이 향하는 주된 포인트들은 조금씩 변화해 왔다. 2015년에는 ‘미러링’이 가장 핵심 키워드였으며, 2019년~2020년에 들어서는 ‘탈코르셋’이 가장 핵심 키워드인 듯 하다.
연극학 박사, 아일랜드 작가인 에머 오툴의 <여자다운게 어딨어>에서도 탈코르셋 담론을 다룬다. 여성은 ‘코르셋’을 입거나 여성 배역을 ‘연기’함으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에머 오툴은, 파격적이게도 ‘여자다운 것’들로 일컬어지는 것들에서 탈피해보는 경험들을 한다.
이 책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던 이유 중 하나는 나에게 '페미니즘'과 '젠더퀴어'에 대해 분리를 시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사실 젠더퀴어와 페미니즘은 크게 보면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두 지향점은 미묘하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젠더에 대해 아예 무너뜨리는 것과, 젠더이분법은 존재하는 상태에서 여성의 언어로 사회를 재구성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던 것이다.
- 2016년 10월에 쓴 <여자다운게 어딨어> 본인 서평 중 발췌.
내가 배운 ‘코르셋’이란, 그것이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며 신체에 악영향을 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요되어 온 일련의 아비투스(habitus)들을 말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세시대의 ‘코르셋’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를 비유하는 명칭도 코르셋이 되었다. 코르셋, 전족, 메이크업, ‘여성스러운’ 긴 헤어스타일, 마른 몸 선호 (로 인한 다이어트 및 거식증) 등이 있겠다. 코르셋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그것을 하지 않았을 때 “너는 여자애가 ~이런 것도 안하니”라는 사회적 질타를 받는다는 데 있다. 즉 여성이기 때문에 강요되어 오는 어떠한 해로운 것들이다. 처음 페미니즘 담론을 배우며, 흔히 사회에서 여성성이라 일컬어 지는 것들이,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좋아서’ 했던 것이라 느꼈던 것들이, 내게 지금까지 어떠한 심적/신체적/경제적 해를 가해왔다는 것을 처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자리에서 탈코르셋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ex.직장 동료들) 굳이 화장한 얼굴 보이지 않기, 편한 옷 입고 가기 등. 대학생 시절 시험기간 학교에서 밤을 새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메이크업을 안 하고 간 적이 없던 나로서는 회사에 맨얼굴로 출근하는 것은 굉장한 혁신이었다. 어색함과 동시에 굉장한 자유로움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탈코르셋 실천은 이 사회에서 “봐라, 여자라면 누구나 저렇게 하고 다니지.” 라는 기존의 견고한 행동강령에 자의로 반례가 되는 일이다. 여성은 누구나 기존의 여성성 수행에 있어 객체가 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재생산하는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 하나 부터라도 기존의 ‘여성스러운 모습’에서 탈피하여 다양한 모습을 하고 다니는 것은 정치적이고, 유의미하다.
그러나 요즘 들어, 이 여성에게 당연하다는 듯 씌워져 왔던 해로운 것들을 벗자는 탈코르셋 담론 관련하여 다양한 의견과 주장을 마주하게 된다. 슬라임 (액체 괴물), 동물 돌보기, (모든 종류의) 메이크업, 로리타 양복, 치마나 스타킹 착장, 남자 아이돌 팬 활동 등 기존의 여성성과 연결이 되었던 모든 습관, 행동, 스타일, 사고 방식 등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이러한 것들을 고수하는 것은 여성성을 계속 아래 세대로 전유 시키는 여성혐오'이며, ‘하등한 취미를 아래 세대 여성들에게 세뇌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이에 대해 “왜 또 여성들에게만 다시 행동규정이 생기는 거냐”는 반박에는 '남자들에게 말해봐야 어차피 못 알아들으니 여자들에게만 말한다’고 답한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여성들이 열심히 버리고 있는 ‘여성성’을 다시 주워다 입고 재생산하기 때문에 이를 막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담론에 있어서 섬세하고 주의 깊게 다뤄야 할 지점이 있다. 탈코르셋 실천을 하고 있는 여성들이 포기하고 있는 것 (여성성이라 불리는 아비투스)들은 그 자체로, 기존의 획일화 된 여성성이란 사실 허상이라는 것을 가시화하기에 상징적이며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 또한 기존의 여성성 행동을 여전히 취하는 여성들-흔히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를 기르는 여성들-은, 없던 여성혐오를 만드는 중이 아니다. 젠더롤의 지향점과 현 지점을 파악하는 것은 오롯이 분류되어야 하며 명확히 직시되어야 한다. 오히려 여성성으로 분류되던 모든 아비투스들을 모두 그들 내면에서 낮은 것으로 인식하고, ‘어차피 남자들은 하지도 않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판단 내리며 이를 하등한 문화로 보는 선민사상적인 시선을 경계해야 한다.
처음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을 때 나는 ‘과거의 나’를 비난하고 한심하게 보며 출발했다. 여자들이 먼저 생산적인 공부와 발전을 도모해야지, 왜 저렇게 현실에 안주해 있는거야. 저렇게 짧고 작은 옷을 사며 몸을 그 안에 맞추고, 아침마다 하품을 하면서도 일어나 화장을 하는데 몰두하고, 한 번 머리 하려면 몇 십만원 금세 깨지는 찰랑찰랑 긴 머리를 유지하려 애쓰고, 정말 한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대다수의 여성들을 비난하는 잣대가 되어 버리기 너무도 쉽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다음 단계는 반성이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해방시키는 인식론이지, 다시금 잣대를 들이대며 조이는 행동규정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많은 여성들에게 “당신이 하고 있는 꾸밈 노동이 사실은 사회적,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행동 규정들이고, 당신이 ‘선택’했다고 믿었던 어떤 것들은 사실 그 선택지가 매우 좁았던 결과이며,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탈코르셋 논의는 매우 유의미한 운동이다. 하지만 그 담론이 타인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 평가를 하기 시작하진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저들보다 더 사회적으로 깨어있고 앞선 세대를 산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오만하게 만들고, 도리어 여성혐오적 시각으로 그들을 판단하려 들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놀랍게도 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여성혐오도 아니다. “나는 다른 여자들과 달라. 비싼 명품으로 치장하지도 않고, 값싸고 저렴한 가성비 생활을 하며 나 자신의 발전을 꿈꾸지.”처럼, 여성인 본인이 스스로 여성을 타자화하며 하등하게 보고 본인은 ‘저들과는 다른 어떤 주체’로 보는 담론은 유구한 여성혐오여왔다. 본인이 페미니즘적인 깨달음을 얻고 나서, 오히려 ‘여성적인 모든 것들’은 하등하다는, 남성적인 시각이 생겨 버리는 것이다. 모든 여성들이 코르셋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의 모습이 어떨까. 이는 상상력의 빈곤과 선민사상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여성혐오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여전히 이 사회에는 꾸밈노동이나 필요 이상의 여성성 수행 강박을 가진 여성들이 너무도 많기에, 여성들 사이에서 탈코르셋적 의미가 있는 전파는 지속해야 한다.
2) 또한 그런 행동들에는 젠더규범이 작용해선 안된다는 의식적 전파가 고차원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떠한 메이크업을 하고싶으면 남성이든 젠더퀴어든 여성이든 누구나 할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남성이 메이크업 하는 것을 가리켜 ‘여자만 하는 하등한 짓을 이젠 남자들이 하는 것’ 이라는 프레임을 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수행이든 누구나 젠더규범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행동과 젠더를 엮어 지적하지 말자는 의미다.
3) 기존의 ‘여성성’을 견고히 해왔던 이러한 수행들이 하등한 종류의 것들이기 때문에 여성들이 그동안 억압받아온 게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쓰이기 위해 불편하게 만들어져 온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탈코르셋 담론에서 흔히 보이는 실수인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러한 것들이 여성들에게만 강요되어 왔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기 위하여 해당 것들이 ‘하등한’ 것으로 큐레이팅되어 온 것이다. 이는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마지막으로, 여성성으로 치부되어 온 꾸밈노동이나 어떠한 것들은, 사실 호모소셜에서 살아와 남성연대감이 가득한 남성들도 그런 가부장적 마인드와 군대 문화에 찌들지 않았더라면 분명 관심 갖고 좋아했을 사람들도 많다. 마치 여성들 사이에서도 늘 이 여성성에 대해 불편함을 겪던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이 갈리듯이. 즉 이 기호성을 가진 모든 것들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하등시를 지양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고, 지정성별과 관련 없이 어떤 사람들은 여성이라는 젠더를 가졌단 이유로 꾸밈노동에 더 관심을 보이기 쉬울수밖에 없는 구조도 조금씩 무너뜨릴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