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링을 통해 현실의 불합리를 지적했다, 그 다음은?
(*해당 글은 2년 전에 쓰여진 글임을 밝힌다.)
2020년, 이제는 슬슬 이야기해 볼 때도 된 것 같아 꺼내는 주제. 이건 <미러링>에 대한 글이다.
‘미러링’이란 원래 쓰이던 전술적 단어는 아니고, 2015년도 메르스 갤러리 (일명 메갈리아) 사태 발생 시 한참 사용되기 시작했던 단어다. 미러링(Mirroring)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미러링 전략은 ‘기존에 있던 약자혐오(특히 여성혐오)적 발언을 반대로 뒤집어 드러내 보여주는’ 전략이다. 공기처럼 주변에 만연하게 깔려있지만, 하나하나의 존재를 인식하기는 어려운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들을 짚어내어 거꾸로 남성에게 적용하며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여성혐오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렸다는 데 있어 미러링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나 역시도 2015년도를 잊을 수 없다. 메르스가 중동지방에서부터 세계적으로 퍼졌을 때, 국내 최초의 감염자가 여성이라는 잘못된 기사로 인해 시작되었던 온라인 상에서의 ‘미러링’의 물결. 지금 돌이켜보면 신기한 일이다. 대한민국에 페미니즘, 여성주의가 들어온지는 이미 20~30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이제서야 이렇게 작은 사건으로 가시화가 되기 시작했을까? ‘미러링’의 전략이란 그만큼 새롭고 자극적이고 발빠른 어떤 것이었다. MSG처럼, 그야말로 그동안 유기농 농산물로 지은 밥만 먹던 대중들이 처음으로 라면 스프에 눈을 뜬 듯한 효과. 어릴 적부터 인터넷이나 컴퓨터, 커뮤니티 등을 돌아다니며 특정 시대에 유행하던 밈(meme)들을 모두 섭렵해왔던 나는 당연히 2015년에도, 그 현장에 있었다.
“중동지방에서 한국여자 메르스 감염ㅋㅋ 원정녀일듯. 각 나오네”
당연하다는 듯이 최초 감염자가 해외에서 원정 성매매를 하고 들어온 여성일거라며 ‘평소와 다름없이’ 디씨갤러리 및 네이버 기사 댓글창에서 떠들며 놀고 있던 사람들. 그러나 이내 최초 감염자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기사가 다시 나오고나서, 디씨 ‘메르스 갤러리’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의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 여자가 아니라 남자네, 그럼 너가 원정성매매하고 온 놈이냐?, 라고. 아마 최초의 미러링이었을 것이다. 이런 양상의 게시글들은 이내 메르스 갤러리를 점령했고, 이 현상은 캡쳐되어 각 온라인 커뮤니티들에 퍼날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여초 커뮤니티를 하던 나는 매일 주기적으로 배달되어져 오는 (?) 이런 ‘메갤’의 새로운 글들을 접하게 되었고, 머릿속에 한참 눌려 있던 대뇌 피질 세포 중 한 쪽 면이 고개를 들고 깨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2015년 5월, 커뮤니티를 하며 가장 내가 많이 뱉은 말은 “아 그러네…?” 였다.
말이 너무 ‘쎄다’면 쎄다고도 할 수 있고 ‘과하다’면 과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튼 미러링 글들은 따지고 봤을 때 맞는 말들이 대부분이었고, 미러링되어 표현되는 말들은 또 대부분 원본 버전(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버전)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참을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속 시원하고 통쾌한 느낌. 남자들은 그 동안 이런 기분으로 살아왔었나? 신선한 깨달음이었다. 그렇게 메르스 갤러리(=메갤) 발 미러링 글들은 여초 커뮤니티들을 쭉 순회해 다녔고, 그렇게 인터넷 커뮤니티를 즐겨 하던 젊은 여성층들을 기반으로 페미니즘적 인식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던 해가 2015년이었다. 그러다 90년도에 이미 출간된 적 있는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노르웨이 소설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이 소설이 현실 세계의 가부장제를 거꾸로 뒤집어 표현한 소설이라는 사실이 퍼지면서 메르스 갤러리는 ‘이갈리아’와 합쳐져 ‘메갈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 사이트를 만들어 디씨인사이드로부터 독립해 나가기에 이른다.
한참 정신없이 미러링 된 글들을 보며 기존의 여성들에게 씌워져 왔던 표현이나 편견들이 ‘여성혐오’라 불리는 것들이란 것도 알게 되고, 이를 거꾸로 남성에게 전복시켜 씌우는 미러링 전략을 보며 이와 같은 전략은 대중에게 원본의 존재를 깨닫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더 공부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여성인권단체나 시민단체, 독서모임 등을 참가하며 공부하기 시작했다. 순둥한 딸이자 장녀였고 학생이었던, 투쟁이라고는 전혀 없던 기존의 내 삶에 처음으로 ‘기득권’, ‘사회적 약자로서의 정체성’ 등을 깨닫게 하여 페미니즘에까지 관심을 갖게 해준 주인공이 바로 <미러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메갈리아 사이트가 만들어지고 난 뒤, 이상하게 얼마 못가 메갈리아 글들을 보는 게 재미 없어졌다. 매번 하는 말들이 비슷했고, 이젠 더 새로운 내용이 없고. 게다가 항상 모든 컨셉질의 가장 무서운 지점은 과몰입인 법이다. 모니터 밖 현실은 아직도 가부장제 사회이며 여성혐오가 들끓고 있는데, 이들은 이 사이트 안에서 마치 실제 ‘이갈리아’가 도래한 듯 여성혐오의 기저를 남성들에게 그대로 입힌 채로 ‘과몰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재밌을 것이다. 본인들이 실제 기득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말들이니까. 언어는 힘을 보여주는 도구고, 그 사이트 안에서만큼은 ‘남성혐오’가 실재하는 가상 사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재미에 푹 잠겨 머무르게 되는 건 왠지 위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한다고 뭐가 바뀌나? 아직 아무것도 바뀐 건 없지 않나?
게다가 무엇보다, 얼마 못가 ‘메갈리아’는 어떠한 정치적 문제가 발생하여 이내 사이트가 폭파되고, ‘워마드’라는 새로운 사이트와 기존의 ‘메갈리아'로 갈라지고 말았다. 미러링 글들이 계속해서 생산되면서 당연히 마주칠 수 밖에 없던 문제들과 마주친 것이다.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당시 메갈리아 안에서 핫했던 표현 그대로 차용해 오자면, ‘게이를 데리고 갈 것이냐 버리고 갈 것이냐’ 의 문제였다. 게이는 소수자니까 상관 없는건지, 여전히 그들도 ‘한남’으로 보고 미러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 게다가 메갈리아의 운영진이 알고보니 게이였다더라, 등등 다양한 담론들이 오갔고 결국 입장 차이에 따라 이들은 워마드와 메갈리아로 갈려 버렸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게 해준 최초의 계기가 미러링이었지만, 한편 미러링의 기능적인 부분과 다른 이 한계점들도 명확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동안 아무렇지 않게 느꼈던, 혹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더라도 이를 언어화할 수 없었던 그런 ‘어떤 경험들과 어떤 말들’이 사실은 여성혐오에서 출발한 것들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미러링 전략은 큰 순기능을 갖고 있다. 또한 앞에서 언급했듯 미러링에는 자극적이고 재미있고 통쾌한 요소가 많기 때문에, 특히 약자 당사자들에게 전파되기가 매우 쉬운 컨테이져스 콘텐츠(Contagious contents)가 되기 쉽다. 그래서 아직 페미니즘적 시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나 대중들을 위해, 앞으로도 미러링 전략을 충분히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 미러링 전략은 다음 단계, Next step이 없다면 무의미한 전략이기도 하다. 깨닫게 하고 난 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지에 대한 부분이 아무것도 없으면 깨달음은 금세 무의미해진다. 그렇게 메갈리아가 그 자리에 멈춰 섰던 순간을 기억한다. 기존과는 다른 가상 사회 공간을 만들어 그 곳에서 나오지 않으려 하며, 그 안에서만 재미에 빠져 과몰입을 한다면 미러링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러링은 사람들에게 마치 꿈처럼 다가가야 한다. 꿀 때는 즐거울 수도 있고 신기할 수도 있지만, 깨고 나서는 곧장 현실로 돌아와야 위험하지 않다. 그 꿈 속에만 빠져 사는 것은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꿈으로부터 얻은 재미나 교훈, 생각을 가지고 현실에 적용하고 반영할 구실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러링도 마찬가지로, “어때 어이없고 웃기지? 이게 여성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였다는 걸 지금 안게 더 놀랍지? 그럼 이제 이런 부분을 완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볼까?” 로 끝나야 그 역할을 다한 것이라는 뜻이다. 재밌지? 재밌지? 이것도 어이없지? 이것도 웃기지? 이건 어때? (무한반복) 으로 이어지는 것은 그 어떤 전략적인 면모도, 페미니즘적인 면모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혐오 발화(hate speech)는 대부분 한 가지만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미러링의 한계가 있다. "여자가 좀 조신한 맛이 있어야지.", 라는 말은 여성혐오만을 담고 있어서 미러링 하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여고딩이 맛이 좋아.”같은 경우는 어떨까? “여자들끼리 하는 가위충년들 더러운데 한번 자 보고 싶긴 하다.”는 또 어떠한가? 고등학생 및 성소수자까지 함께 성적 대상화를 하여 여성혐오와 버무려 낸 이와 같은 혐오발화들은 미러링을 하기도 어렵다. ‘여성혐오’ 부분만 남성으로 바꾼다면 결국 청소년혐오와 성소수자혐오적인 부분은 고치지 않은 채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젠더 이슈나 노동자 이슈를 미러링하고 전복시켜 표현하는 전략처럼, 퀴어나 장애인이나 청소년도 미러링 전략을 사용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항상 있다. 하지만 여성이나 노동자들이 기득권을 상대로 미러링하는 표현이 사회적으로 ‘그나마 용납’되는 이유는 약자층의 머릿수가 적지 않다는 데에서 온다. 여자가 남자보다 수가 적지 않고,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보다 수가 많기 때문에 ‘대중’들이 공감하며 웃고 퍼뜨릴 수 있다. 하지만 퀴어, 장애인, 청소년 등은 그렇지 않다.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한남들이 역시 한남짓 또 했다.”는 말은 수용이 되지만, “헤테로들이 또 헤테로짓 한다.”, "청인(청각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이 또 청인짓 한다."는 말은 사회적으로 수용이 되지 않는 분위기를 많이 느낀다. (남성 대상 미러링에선 통쾌해 하며 웃던 사람들이 갑자기 "모든 헤테로들이 그런 건 아니지, 싸잡아서 말하지 말아줬음 해. / 모든 비장애인들을 싸잡아서 말하니까 장애인들에게 거부감이 드는거야."라고 말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사회적 기득권을 갖고 있으며, 본인이 가진 기득권 부분에 있어선 인권이슈에 무지하기 쉽고, 권력을 휘두르는 짓을 쉽게 할 수 있단 점에서 ‘남성’과 ‘비퀴어’, 그리고 ‘비장애인’들은 사실 비슷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개인적인 아쉬움이다.
어찌됐든 미러링 전략은 사회적으로 대중들의 공감과, 자극적인 요소를 통해 퍼져 나가기도 비교적 쉽고 효과적인 전략이다. 기득권층이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가져왔던 특권(previllage)에 대해서는, 기득권층도 약자층도 인식하지 못하기 쉽다. 이를 모두에게 알려주는 확성기 역할을 하는 것이 미러링이다. 하지만 그만큼 아쉬운 점도 많다는 것과, 미러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전략이 아닌 ‘도구적 전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