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대한 여유로움과 느림의 미학을 요즈음에 깨닫고 있다. 몸과 마음이 살이 쪄서일까 모르겠다. 겨울이라서 그런가 다른 사람들도 서두르는 것 같지 않다. 그늘에 누워서 쉬는 현지인들을 보았던 이도시가 문득 뇌리에 스치며 2007년 9월이 떠오른다. 캄보디아 씨엠립 이 도시를 여행 가려고 미리 계획하지도 않았다. 앙코르왓이라는 건 대중매체를 통해서 이미 들었다. 그때에 우리 형제에 기둥이 셨던 어머니가 미국에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여동생 가족과 함께 부모님은 미국에서 5년 동안 거주하고 계셨었다.
우리의 마음은 갈 곳을 잃은 양들 같은 처지였다.
아버지와 우리 형제의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인생에 중, 후반대 이후의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당한 상황에 우리 형제 모두 다 몇 킬로씩 체중이 감량됐다.
모든 일에 손을 놓았다.
상실감을 안고 그때 남동생이 캄보디아에 거주하고 있었기에 방문할 수 있었다. 단체 관광으로 그곳 씨엠립 Siem Reap으로 떠났다. 동행자는 언니와 직장동료 이렇게 3명이었다.
단체 투어는 씨엠립 Siem Reap 공항에서 현지 한국인 가이드와 만나게 되어 있었다. 밤늦게 인천공항을 출발해서 아침에 씨엠립 Siem Reap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사람들을 모으고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 주었다. 버스에 탑승하고 호텔로 갔었다. 짐을 놓고 바로 버스 여행을 시작했다. 그 호텔들은 거의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거라는 걸 들었다. 호텔 앞은 비포장 도로였고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었다. 국내에 9월보다 더 더웠던 것 같았다. 반팔 차림에도 땀이 났고 버스 안은 에어컨을 켜고 다녔다.
건기, 우기 절기 중에 우기 계절이 지났다는 걸 들었다. 20명 정도 같이 다니면서 한국인 현지 가이드였다. 캄보디아 현지인도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다녔다. 때 때로 동료인 것처럼 한국인 현지 가이드를 돕기도 하며 우리 단체와도 친밀했다. 현지 한국인 가이드는 캄보디아 말로 그 사람과 대화하는 듯했다. 우리는 실제로는 처음 보는 이국적인 모습들을 보았다.
2001년 제작된 영화 툼레이더 촬영지로 씨엠립 city 따프롬사원의 일부인것 처럼 자라난 나무 용수라고 하는 열대 교목.
2. 영화 툼레이더의 촬영지
인솔해서 첫날은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그곳 '브라마의 조상'이라는 의미의 따프롬 사원 Ta Prohm Temple을 갔다.
2001년 제작된 영화 툼레이더( TOMB RAIDER)의 촬영지였던 따프롬사원으로 가서 나무의 뿌리가 사원의 건물 위로 덮은 장면을 보았다.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 돔을 만들기 전에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12세기에 건립한 불교 사원이라고 설명했다. 1860년 프랑스 탐험가인 앙리 모우가 정글 속에 숨어 있는 사원을 발견했다고 했다. 사원 내부에 통행이 불가능한 곳이 있을 정도로 사원의 일부인 것처럼 자란 나무는 용수라고 하는 열대 교목이라 했다. 거대한 나무뿌리가 사원의 건물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앙코르 톰의 유적지 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곳이라고 했다.
쇠락한 따프롬 사원이 있는 이곳 씨엠립 city에 올 때의 심정보다 훨씬 밝아져서 우리는 신기해하면서 걷고 또 걷고 구경했다.
날씨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하는 온도의 계절이었다.
우리 단체 투어는 버스로 이동했지만 거리에는 툭툭이라는 교통수단도 있었다. 앞에 오토바이에 연결되어 있고 뒤에는 마차처럼 사람이 승차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택시처럼 요금을 지불하고 타는 것 같았다. 앙코르 돔으로 이동했다. 허물어진 부분이 있지만 꽤 넓은 것이 하나의 도시였던 것 같았다. 약 300만 제곱미터의 면적이라고 했다. 앙코르 돔 Angkor Thom의 신비스러운 돌 색깔을 감상하면서 그 옛날 왕국이 있었던 이 도시를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가이드는 우리를 과일상점으로 안내했다. 나무에서 바로 떨어트린 것 같은 코코넛 그 열대 과일을 통째로 빨대만 꽂아서 시원하게 마셨다. 이곳 캄보디아로 출발할 때의 심정보다는 훨씬 마음이 좋아지고 있었다. 여행의 피로를 위한 마사지 샵도 들렀다. 캄보디아 현지인들이 여행객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었다. 손님이라서 인가 한국인들에게 아주 잘하는 걸 보았다. 잠시의 휴식이 적절했다. 마사지를 참 성의껏 잘해주어서 우리의 단체는 좋아라 하며 그곳을 나왔다.
바이욘 사원 Bayon Temple에 가서는 사면의 불상이 한 개의 기둥에 돌로 쌓아서 지어진 걸 보았다. 그 불상의 높이가 아주 높은걸 보고 따뜻한 돌 위에 앉아 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이한 색의 돌이었다. 캄보디아 고대의 돌로 건설된 것들을 보면서 신비롭다고 모두 한 마디씩 했다. 그 장소도 많은 여행객들이 있었다.
버스로 지나면서도 또 걸어서도 현지인들을 볼 수 있었다.
표정도 순수한 그들은 해먹을 나무 사이에 매달아 놓고 누워 있는 모습도 보았다. 높은 온도에서 얇은 셔츠와 바지 차림들이었다. 대부분 날씬한 현지인들이었다. 동물들의 모습도 보였다. 국내에서도 말을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특히 더 마른 모습들이었다. 저게 말이 맞나고 하며 가이드한테 그 점을 물어보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말들이 말랐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
프레 룹 Pre Rup이라는 곳도 보았는데 의미는 화장터라고 했다. 프놈바켕과 함께 일몰의 명소로 유명한 사원이었다. 이 사원은 왕족의 화장터 역할을 했다고 했다. 프레 룹이라는 이름은 '몸을 뒤집다'는 뜻으로 시신을 한번 뒤집어 화장하는 캄보디아의 전통 화장 방식을 의미한다고 했다. 일몰 때는 아름 다운 석양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주로 3층 난간에 앉아 밀림 속으로 지는 해를 보며 감상할 수 있다. 해 질 녘에는 붉은빛을 띠는 사원의 모습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가이드는 캄보디아 현지 사람과 함께 우리 20명 정도를 안내하고 다녔다. 그때 비디오로 우리의 모습도 촬영해서 마지막 날에 CD로 나누어 주었다.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사원의 모습과 감상하는 우리의 모습을 찍곤 했다. 요즈음도 그런 촬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날 저녁에 뷔페식으로 식사를 했다. 음식은 거의 한국식이었고 앞에 무대에서는 공연을 하는 곳이었다. 한국인 여행객들이 모두 손님인 것 같았다.
씨엠립 Siem Reap 툭툭이(사진출처- 네이버포스트 KLOOK)
3. 신비로운 사원 앙코르왓
다음날 아침에 다시 단체로 버스로 이동했다. 앙코르 왓 Angkor Wat으로 가려고 매표소를 먼저 갔다. 버스에서 모두 내렸다. 한 사람씩 매표소 앞으로 줄을 지어서 갔다. 그러고 나서 우리 모두 다 버스로 돌아왔다. 매표 수입은 캄보디아가 아닌 이곳을 발견한 탐험가의 나라이거나 여행지로 개발한 나라의 수입이라는 것 같았다. 가이드가 입장권을 하나씩 건네주러 왔다. 목에 걸며 보니 입장권에 각자의 사진이 새겨 있었다. 반복 입장을 못하게 하는 방법이라고도 했다.
훌륭한 관광자원인 앙코르 왓이 있는데도 그들의 수입이 안되서일까 현지인들은 아주 시간이 많아 보였다. 한국 국내처럼 바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아이들은 '1달러' 'one dollar'를 외치며 다녔다. 여행객들이 주는 1달러가 그곳의 물가에 비해 굉장히 큰돈이라고 했다. 수공예품을 여행객에게 파는 아이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다시 버스로 15분 정도 이동해서 크메르 왕국을 건설했던 앙코르 왓으로 갔다.
앙코르 Angkor는 '왕도'라는 의미이고 와트 Wat는 '사원'을 의미한다고 했다.
가이드 없이 관람하기에는 미리 공부를 해와야 할 정도였다. 각 나라의 언어로 앙코르왓 사원을 가이드해주는 제복 차림의 캄보디아 현지인들도 넓은 입구에 있었다. 사각형의 그 사원 둘레에는 해자라는 물이 마치 사각의 연못처럼 넓은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을 건너가는 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만화 영화에서 본듯한 건축구조였다. 외부인의 출입을 쉽지 않게 지은 것처럼 보였다.
여행객들은 위해서 다리를 건설한 걸까. 정글에 뒤 덮여서 몇 백 년 동안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던 앙코르 왓 사원이었다. 전기가 들어올 수 없는 것도 주위의 밀림을 통과해야 하는 공사가 힘들다고 했다. 지금은 방송에서 보았을 때 전구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우리가 방문했을 2007년에는 야간 개장은 없다고 했다.
프랑스의 박물학자가 표본채집을 위해 이곳을 1861년 발견했을 때는 정글이 우거져서 길도 없는 곳이었다고 했다. 이 지역은 1972년부터 폐쇄된 후 낮이면 베트남군이 밤에는 크메르루지의 게릴라가 번갈아 장악했다고 한다. 훼손된 상태가 많고 1982년 집계에 의하면 유물 30점이 없어졌고 대부분은 외국으로 유출되었다고 했다. 전체 유적의 70%가 파괴되었으며 복원 불능의 상태라고 했다. 이 사원의 건축 양식은 건물의 형태나 석조 장식 등 앙코르 왕조의 독특한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전체 760미터에 이르는 벽의 부조 등 안의 돌로 조형한 샘물 화려한 십자형 탑 등 뛰어난 구조물이라 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3년 조사단을 파견하여 이 유적지를 복원을 위해서 캄보디아 당국에 통보하기도 했다.
앙코르 왕조는 13세기경부터 쇠망하기 시작하여 15세기경에는 완전히 멸망했다고 했다.
이에 따라 그 후에 앙코르 왓 사원도 정글에 파묻혀 버렸다고 했다.
앙코르 왓 외부 담벼락
앙코르왓 사원 건물 외벽에 수십 미터 길이의 돌에 새겨 넣은 부조
장수들은 코끼리, 말을 타고 병사들은 걸어가는 모습의 부조
사각형의 사원은 돌을 높게 쌓아서 만들어져 있었다. 아직도 어떻게 건축했는지는 미스터리라고 했다.
초 현실적이기도 한 건축물을 땀을 흘리며 보았다.
그 당시의 왕 수리야 바르만 2세가 크메르 왕국을 건설한 것이라고 했다.
벽면의 조각되어 있는 부조들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과거에 제작되었지만 일부는 현대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원 면적은 60만 제곱미터라고 했다.
여행객을 위해서 위로 올라가는 부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60도 정도 여서 쉽게 오르진 못했다. 대부분은 여행객들은 올라가서 아래로 내려다보았다. 돌로 쌓아서 탑을 만들고 넓은 돌에 부조를 새겨 넣고 그 이외의 바닥들은 모두 흙이었다. 잔디처럼 잡초가 파랗게 흙 위에 자랐다. 캄보디아의 국기 안에 그림이 앙코르 왓 사원이라고 했다. 그 앙코르 왓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많은 여행객들을 캄보디아로 불러들이는 사원이었다.
그리고 세계 7대 불가사리 중에 하나이기에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기도 했다.
점심을 한국식으로 먹으면서 쉬었다. 다음으로 버스로 이동한 곳은 톤레삽 호수의 수상가옥을 보려고 갔다. 단체로 커다란 배를 타고 호수 위로 속력을 내서 가다 보니 수상가옥들이 보였다. 수상가옥에는 학교도 운동장도 다 갖춰져 있었다. 학교로 가려고 배를 타며 배를 타고 가서 운동장처럼 넓은 공간에서 축구도 한다고 했다. 배에서 축구 경기하는 걸 보니 공을 잡으러 수영하고 가는 것이 보였다.
우리 단체의 커다란 배 근처로 작은 배의 상인들이 많이 지나치며 장사를 했다. 거의 반 강제로 물건을 사기도 하는 걸 보았다. 한 백인 할아버지가 수상가옥에 사는 걸 보았다. 유럽에서 살다가 이 수상가옥의 생활에 흠뻑 빠져서 이주했다고 했다. 호수를 들러서 보면서 이곳도 생활의 터전이구나 하고 느꼈다. 다시 배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서 우리의 단체는 배에서 내렸다.
그날은 숙소로 가서 단체에서 떨어져서 우리는 그곳 씨엠립에 살고 있는 남동생과 저녁 먹으러 갔다. 그 도시 씨엠립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 많이 있었다. 한국인 여행객이 끓임 없이 온다는 앙코르 왓 사원이 있는 씨엠립이었다. 그 도시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한국음식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씨엠립 Siem Reap 시내의 카페를 가보았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랑하는 2층 카페는 분위기도 좋았다. 우리는 평생에 담배도 안 피신 분이 어느 날 청천벽력같이 갑자기 폐암이라는 병명을 얻었던 우리 어머니 얘기를 많이 했다. 정말 허무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얘기 하다가 서운함을 마음에 넘치도록 담았다. 미국에서 거주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품에 껴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톤레삽 호수의 가게와 학교
톤레삽 호수의 수상 가옥
4. 프롬펜을 다녀오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city로 버스로 갔다. 비 포장 도로로 한 5~6 시간은 이동했다. 잠들었다가도 너무 흔들리는 비포장도로인 탓에 깨어나곤 했다. 흙길을 달려 고생하며 가봤던 곳이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는 그 유명한 킬링필드라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학살 그리고 고문 가혹한 노동을 기념하는 곳이 있었다.
1975년부터 4년 동안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학살한 20세기 최악의 사건이었다. 이때 사유 재산을 빼앗고 지식인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했던 곳이라고 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소재로 킬링필드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그 시절의 학살 등을 영화로도 보았지만 직접 실감 나게 보고 나서 다시 비포장도로로 버스 타고 씨엠립 Siem Reap city으로 돌아왔다.
여행은 배움에 연속이지만 이번 여행은 사원을 보고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때로는 삶에 의미를 운치 있게 깨닫기도 하는 여행을 그곳 씨엠립 Siem Reap city으로 떠날 때보다도 훨씬 나아진 기분으로 돌아왔다.
여행이 마음의 상실감도 치유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마음에 재산이 늘어난 느낌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 아시아 지역을 국내에서 많이 여행 가는 걸 알지만 나의 경우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여행은 같은 나라 같은 도시를 또 가더라도 갈 때마다 동행인이 달라질 때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확연이 느낌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나라를 또 가고 또 가는 걸 들었다. 다음 기회에 아시아 여행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