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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쟁 Apr 29. 2022

마지막 공격

6살 남자아이

 올해 여섯 살이 된 첫째 아들은 요즘 아빠와 일명 '공격 놀이'를 하는데 빠져있다. 로봇 놀이, 동물놀이라고도 불리는 이 놀이는 그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사납고 포악한 동물이나 한창 빠진 변신로봇 중에서 골라서 그 캐릭터에 맞는 공격과 방어를 하는 놀이다.

 이 놀이의 시작은 보통 "아빠 뭐 할 거야? 나는 00할 건데"로 시작된다. 옵션은 주로 벌꿀 오소리, 삵, 사자, 상어 같은 실제 존재하는 동물들 외에도 스밀로돈, 모사 사우르스 같은 상상동물들도 포함되고 헬로카봇의 수십 가지 로봇 중에 한 가지나 두 개를 결합한 형태를 선택할 수 있다.

 

 아들의 사촌 형이 물려준 '최강 동물 왕'이라는 책이 시작점이었다. 받을 땐 멀쩡한 책이 지금은 거의 모든 장이 테이핑이 되어 마치 책이 싸움에 나갔던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아들이 더 이상 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지 못하게 몰래 숨겨둔 적도 있다.

 4살 된 딸도 합류해서 자기가 아는 동물이나 오빠나 아빠가 방금 읊고 지나간 것들 중에 탈락시킨 뭔지 모를 이름들을 낱알같이 주워듣곤 "나는 오늘은 꿀벌 오소리 할 거야"라는 식으로 야무지게 목소리를 낸다. 이 놀이에 진심인 아들은 어린 동생의 잘못 발음된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동생이 새로 연구해낸 캐릭터라고 생각해서 "그게 뭔데? 혹시 꿀벌 독침이랑 오소리가 합쳐진 거 아냐?"하고 랩 하듯이 자기의 생각을 물어본다. (아빠와 약속한 시간이 가느다란 생일 초처럼 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시작점에서 그의 엔진은 출발 못해 안달 난 람보르기니급이다.)  물론 4살 딸아이는 자신도 소외되는 것이 싫어서인지 이 놀이에 진정성을 설명하려 든다. "어, 맞아. 독침을 이렇게"하고 설명할라치면 이미 남자들은 둘 중 하나가 "나부터 공격"을 선창한 뒤 뒤이어 "이이이이이"하는 괴이한 동물소리를 내며 포악한 맹수 또는 최신 로봇의 박진감 넘치는 공격과 방어가 시작된다. 아들이 없는 집에선 볼 수 없는 진풍경 중의 하나일 텐데, 6살 난 아들의 눈빛에는 이겨야만 사는 자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치켜뜬 눈과 갈고리처럼 만든 손은 이리저리 할퀴고 덤비는 상대를 날리는 시늉을 하고 "나 이제 블랙맘바야, 자 독침 공겨어어어어억 칙"하며 침 뱉는 시늉을 하다가 진짜로 침을 뱉는 바람에 놀이가 중단되기도 한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공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매트와 이불을 깔고 점프는 침대 위에서만 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작에 윗집에서(우리 집 1층. 만세) 이미 한 달 전에 가정폭력이 의심돼서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둘째 딸은 한두 번 아빠 등에 업히거나 깔아 뭉개지는 척하며 아빠의 간지럼 세례를 즐기다가 아빠와 오빠의 공격이 격해진다 싶으면 가짜 울음을 터뜨리다가 슬쩍 빠져나와서 "나 이제 그냥 사람이야." 하곤 "엄마, 이 책 읽어줘"하며 책을 가져다가 내 품에 파고든다. 사실 체구는 둘째가 첫째에 비해 더 좋은 편이고 운동신경도 더 좋아서 각 잡고 공격을 할 때면 유도나 레슬링에서 볼법한 자세와 힘을 쓰는 것을 보며 나와 남편은 대견해한다. 엉덩이로 찍고 바운스로 한번 더 누르기, 목 뒤에서 거는 헤드락, 엎드린 채로 바닥에서 안 떨어지는 기술까지, 둘째 딸은 깔깔 웃어대며 한다. 마치 남편 어깨너머로 본 UFC, 주짓수에서 본 것들이 그녀에게 표본이 된 것 같았다. 독침 공격, 캥거루의 뒷다리 차기 같은 캐릭터의 특성에 맞는 기술을 세분화시켜 집중하는 아들과는 다른 분위기다.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잔재주를 부리는 동안 둘째는 큰 동작들로 몇 번의 센 공격과 방어를 하다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자릴 털고 일어나는 모습도 가관이다. 그리고 17개월 된 막둥이는 형아나 누나 또는 아빠 등에 올라타서 "이이이"하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럼 큰아들은 "어, 너 지금 도와주는 거야? 고마워, 자 물어뜯어 이이이이이 여깄다, 우린 콤보 히포타무스다!!" 하거나 동생이 아빠에게 잡혀서 간지럼을 타고 있으면 "감히 내 편을 공격하다니, 가만두지 않겠어"하며 준비해둔 가장 센 공격을 펼친다. 아직 어리지만 더 어린 동생이 다치지 않게 나름 보호해가며 몸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예뻐 보이면서도 나는 안전요원의 의무로 지켜보다가 싸움을 중재시키고 막둥이를 사이에서 빼내곤 한다. 그 틈에도 아들은 숨찬 목소리로 "아, 엄마. 엄마는 무슨 캐릭터야? 지금 우리 공격한 거야 아님 지켜준 거야?" 하며 놀이에 심취한 채로 맥을 이어나가려 애쓴다. 나는 둘째 책을 서너 권 연달아 읽어주다가 또는 저녁 설거지를 잽싸게 하고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는 개킨 다음에 시계를 보고 수영장의 호각소리처럼 "자 이제 마지막 공격이야"하고 말한다.

 아들의 반응은 매번 똑같다. "아 나 조금밖에 공격 못했는데!" 남편 역시 볼멘소리다."야 이 녀석아 벌써 30분째 했잖아. 20분만 한다고 해놓고선 엄청 많이 한 거야. 자 이제 진짜 마지막 공격이야"

 말이 30분이지, 심장이 발에 달린 기운찬 6세 남자아이와 쉬지 않고 몸싸움을 내리 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남편은 종종 일하는 것보다 놀아주는 것이 더 고되다고 했다. 실제로 일만 한 날엔 남편은 아이들 취침 시간 이후에 거실에서 스포츠를 관람하고 이 공격 놀이를 한 날은 (일주일 중 6일) 대부분 코를 골고 아이들보다 먼저 잠든다. 참고로 우리 집 취침 시간은 8시 반이다.  


 지칠 대로 지친 두 남자들이지만 한 명의 고집으로 인해서 경기가 끝나지 않는다. 동생들의 눈엔 졸음이 가득하고 어떤 날엔 셋째가 옆에서 드러누워 잠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 공격은 마지막 싸움다워야 한다. 경기 내내 싸움의 승자는 매번 아들인 것 같지만 마지막 공격에선 더욱 반드시 아들이 이겨야만 하는 탓에 남편은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서 승리감을 맛볼 수 있는 경기를 이끌어 나간다.(매일 놀이를 하는 것도 존경스럽지만 남편의 이런 세심한 노력이 가장 갸륵하고 애틋하게 여겨진다. ) 나 같은 경우는 경기를 쉽게 끝내기 위해서 "아, 이렇게 한방에 무너지다니, 으으으 분하다. 다음번에 보자"하고 연기를 하지만 아들 눈엔 엄마가 후다닥 남은 재료로 김밥 싸듯 마지막 공격을 마무리하는 것이 보이나보다. 이내 캐릭터의 이름 대신 금기어인 호칭을 불러가며 나를 말린다 "아, 엄마. 이렇게 끝나는 거 아니야. 다시 살아났어. 자 어서 일어나 봐, 갈기를 휘두르면서 나를 다시 공격하는 거야 어때?" 하며 적에게 훈수까지 둬가며 기어코 시든 파를 땅에 심고 꼿꼿하게 지지대까지 꽂아주는 정성을 보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살아나는 척 하지만 도무지 이 공격 놀이에 창의력을 발휘하기가 힘들다. 아들이 나보다는 남편과 공격 놀이를 주로 하려는 이유를 나도 알 것 같다. 아무튼 남편은 최대한 억지로 쉽게 지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아들의 공격을 받아내다 사망에 이르는 과정을 역대 서사로 풀어낸다. 정성과 공을 들인 이 마지막 공격을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고 지켜보다가 남편의 마지막 신음소리가 잦아들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박자박 정수기로 걸어가서 맹렬하게 싸운 두 사람을 위해서 물을 뜬다. 요새는 눈치 빠른 둘째가 이미 떠 놓는 경우도 많다. 꿀떡꿀떡, 마지막 공격까지 무사히 마친 전사는 목욕한 것이 아깝게!! 땀으로 젖은 머리를 하고 일주일치 장작을 패고 온 돌쇠처럼 물을 마신다. 암벽을 타고 올라서 날개꺾기인지 뭔지를 하며 내려와서 뭔가를 박살내고 찢고 물어뜯는 아들에게 일순간 "자, 이제 자자"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노래방에서 애창곡의 클라이맥스를 열창하는데 누군가가 실수로 누른 예약 버튼에 일순간 연주음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성숙한 어른이라도 이런 상황엔 "아, 뭐야" 하고 실망한 티를 낼 것이다. 나의 6세 악토테리움은 부침개같이 뒤집어지며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주먹질을 해대며 억울해한다. 하. 나. 도. 못 놀았다며. 아직 공격 몇 번 못했다며.


 그래서 오늘도 우린 이제 자자는 말 대신 "자, 이제 마지막 공격이야"라고 불의 강약 조절을 한다. 물론 그의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 짐승의 에너지는 한 번만 더,로 연장되기 일수고 얄미운 단골에게 마음 약한 우리 부부는 엄한 표정으로 "이제 진짜 마지막 딱 한 번이야"하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이 몇 신지 아니 내일 어쩌려고 해 따위의 에너지 소모는 불필요하다, 다만 남은 힘을 쥐어짜는 남편의 사랑과 인내가 있을 뿐. 오늘도 아들의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 공격을 봐주다가 "마지막 공격, 그거 대체 언제 끝나는데?"하고 남편과 눈을 마주치며 깔깔거리고 웃다가 단단하고 야무진 황제 매머드의 주먹 공격에 거실로 도망쳐 나왔다. 마지막 공격 안 당하고 싶다면 최강 동물 왕, 이 책을 조심하라. 다락원의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책을 집에 들이는 순간 '마지막 공격'의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아랏차차 핵주먹 나가신다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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