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의 인사
"welcome aboard!"
"Good bye, have a great day"
하루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 중 하나인 승무원은 오늘도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눈다. 외국 항공사라서 주로 영어로 인사를 하지만 가끔 가는 서울 비행에선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인사하다 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안녕하십세요. 조심히 가해요. 하고 혀가 꼬여 욕인지 인사인지 모를 별 이상한 말을 내뱉다가 진땀이 나기도 한다. 서울행 비행이었다. 유독 한국사람들은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이 특징인데 그날도 새벽 비행이라 그런지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승무원들이 무색해지게 눈도 안마 주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참다못한 어떤 동료는 "너네 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우리한테 화가 나있냐"라고 웃으며 묻는다. 그 와중에 지나가는 한국 아저씨 한분이 우리를 어깨빵하며 지나갔다. 미안하다거나 실례한다는 제스처 없이 지나가는 손님을 보고 어이없어하길래 내가 웃음기 가신 표정으로 로봇 흉내를 내며 말했다. "우린 로봇이야, 미안해"
승무원의 직업병이 있다면 '인사병'이란게 있겠다. 호텔이든 어디서나 엘리베이터에 타면 타고 내리는 사람들 모두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서구권에선 많은 사람들이 눈으로나마 인사를 건네기 때문에 이런 남주는 인사 버릇이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지만 한국에선 다르다. 특히 겉보기에도 토종 한국인인 내가 한국에서 그런 직업병을 시전 했다간 다들 이상하게 쳐다보거나 놀라는 눈치였다. 서울 비행 당시 호텔에 묵을때 유니폼을 일반복으로 갈아입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길. 다른 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중년 남성이 들어서자 나도 모르게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아저씨는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흐흠 헛기침을 하며 엘리베이터 닫침 버튼을 서둘러 눌렀다. 아차, 싶어 안 해야지! 인사 안 해야지 다짐하고 있는데 또 다른 층에서 문이 열렸다. 같이 비행 온 외국인 동료가 역시 환복을 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는 길이었다. 내가 아는 체하고 인사할 찰나, 그런데 그 친구가 내 눈길을 피하며 어깨를 좁히고 우리 틈으로 들어선다. 꼭 한국사람 같았다. 내가 로비에 내리면서 뒤에서 깜짝 놀라게 하며 어디 가냐고 하자 동료는 화들짝 놀라며 왜 아는 체 안했냐고 한다. 네가 눈을 피하길래, 하자 하는 말이 "여기 한국이잖아..." 하는 말에 웃었다. 한국 비행을 자주 오면서 한국 문화에 눈을 뜬 외국인이 이문화를 받아들인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그 문화란 게 '안인사 문화'인 것이 마음이 아팠다.
남아공 출신 남자 승무원과 턴오버 비행을 한 날이었다. 턴오버 비행은 출발한 날 당일치기로 도착지에서 다시 새로운 승객을 태우고 베이스캠프인 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이다. 보통 편도 6시간 미만의 짧은 비행이지만 이착륙이 두 번씩이다 보니 만나는 승객의 수는 배로 많고 업무량도 긴 비행과 동일하다.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인사를 하는 날이다. 이코노미 승객만 400여 명인 A380 기종의 경우, 가장 앞쪽 문에 섰다간 그날 인사하는 손님만 800명, 이것을 보딩 두 번, 페어웰에 두 번 해야 한다. 인사만 해도 기진맥진하다. 나이가 가득 찬 20년 이상의 동료는 중간에 돌아서서 물을 마셔가며 인사하기도 한다. 옆에서 기가 막힌 미소를 날리며 여유 있게 인사하고 서 있는 남아공 승무원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해? 너 인사 진짜 잘한다. 네가 인사로 이겼어 400명." 내 농담에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알려줄까 내 인사 비밀?" 예상치 못한 전개에 그다지 안 궁금했던 그의 인사 비밀을 물었다. "엉덩이 쥐어짜기. 해봐, 스릴 있어. 안 지루하고." 그렇다, 그의 평범한 인사가 특별할 수 있었던 데는 그만의 노하우가 있었다.
다른 어떤 비행에서 영어권 출신 동료에게 물었다. "나 사실, 내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어서 그러는데 매번 인사할 때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 같아서 말인데 너는 뭐라고 여러 가지 섞어 말하더라? 좀 알려줘 봐. 자연스럽게 로봇처럼 안 들리게 나도 배울래." 그러자 그녀는 "야, 나라고 뭐 새로운 말 만들어내는 거 아닌데 뭘, 근데 비행하다 보니 생긴 노하우가 있어. 잘 봐봐." 하더니 그녀는 복도 끝에서 시작되는 승객 행렬을 맞이하며 인사한다. 들어보니, 굿바이, 해버 굳 데이, 날씨 좋네, 뭐 그런 반복되는 짧은 인사들이었다. "눈치챘어?"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하는 말이 "아니, 1번 승객이 나한테 한 인사를 나는 그대로 2번 승객한테 하는 거야 그럼 2번이 나한테 뭐라고 하겠지? 그럼 그걸 그대로 3번 승객한테 해. 생각할 필요? 없어." 나는 승객들이 이 성의 없는 복사기 인사를 눈치채지 않나 조바심을 내며 그대로 해봤다. 웬걸, 아무도 눈치채지 않고 돌아보는 사람 한 명 없이 제 갈 길 가더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반복될수록 인사에 대한 강박관념도 사라졌다. 마치 자주 보는 사람에게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인사를 하면서 마음의 부담이나 죄책감 따위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나에게 우리에게 승객들은 세상 다정한 웃음으로 반기고 헤어지는 인사를 건네면서 이름 철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로 남게 되었다. 문제는 이 공허한 인사가 함께한 동료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지난 비행에서 누구랑 비행했더라, 하는 질문, 기억은 사실 특별한 사건이 아니고선 내 머릿속에서 작년 오늘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는 것만큼 의미 없어졌다.
두바이에서 이제 막 어떤 비행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행 비행기에 탔다.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가야 했기에 검은 옷을 입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구석에서 담요와 함께 구겨져서 잠을 자다 내리는 길, 내 얼굴을 알아본 동료가 인사를 건넨다. "오, 휴가 가는구나." 비행에서 마주치는 동료에게 건네는 아주 흔한 인사 속에 나는 그래도 나를 알아본 동료가 고마워서 속사정을 말했다. 앞뒤로 이어지는 승객 행렬이 방해되지 않게, 아주 짧게. "장례식장 가" 그러자 동료는 내 말을 못 들은 마냥 "나이스 드레스. 좋은 시간 보내" 하고 웃는다. 순간 내 말을 알아듣고 얼굴이 굳어지는 연륜 있는 다른 승무원과 눈이 마주쳤다. 제기랄, 에이 승무원아.... 민망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내렸다.
그 후로 나는 인사를, 대충 하지 못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나에겐 점묘화 같은 수백 번의 지루한 인사라 해도, 다시 안 볼 사람들이지만 끝까지 집중해서 잘 가란 인사를 진심을 다해 건넸다. 내 인사가 그렇게 돌아보는 일 없이 멀어져 가는 뒤통수들을 향해 친정엄마가 싸주는 김치 보따리 같은 내 마지막 진심으로 다가가지길 바랐다. 승객들이 떠난 빈 캐빈을 구둣발로 또각또각 걸으며 오늘 하루라는 피로감도 인사로 다했다는 일종의 홀가분함도 느꼈다.
여섯 살, 4살, 아이들에게 인사를 가르친다. 쭈뼛거리는 아이들에겐 이것이 아무나 못하는 특급 훈련이라고 했다. 어린아이들 인사도 안 받는 어른들도 사는 대한민국에선 실제 그렇기도 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 잘해야 해, 헤어질 땐 더욱. 언제 볼지 모르니까. 두 번 다시 못 볼 수도 있고. 습관이 무서운 거라고, 비행기에서 내린 지 수년이 지났어도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먼저 인사를 한다. 인사를 받든 안 받든 이 구역은 내 것이라는 광활한 마음이 열린다. "안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