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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쟁 Sep 04. 2023

승무원의 향수

 

https://www.directoryofillustration.com/rep.aspx?RID=547


  어느날 영화관으로 가는 엘레베이터를 탔다. 친구는 이미 도착해서 팝콘을 사고 있었다. 평일 대낮이라 나 밖엔 없었는데 엘레베이터 안에는 익숙한 향기가 났다. 내가 비행하던 근 10년 가까이 쓰던 향수였다. 연보랏빛 향수 보틀로 유명한, 국내에도 매니아층이 있는 봄여름에 어울리는 은은한 꽃향이 나는 향수다. 누군가 뿌린 그 향수는 주인은 없는데 금세 좁은 엘레베이터 안을 보랏빛 파도처럼 채워놓았다. 난 일순간 기내의 의자와 의자 사이를 누비던 때의 편안한 심정이 들었다. 이 향수를 뿌리면 난 유니폼을 입은거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비행기 안의 엔진소리가 들리는듯하고 유니폼 구두를 신은 발의 느낌이 났다. 내 집에 온 손님 대하듯 비행기에 탄 생면부지의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하던 때의 느낌이 향수 냄새로 살아났다. 그러고보니 봄이 와 있었고 이 향수는 어느 계절보다도 따뜻한 날씨에 잘 어울리는 향인 것도 기억났다. 마치 두바이 사막땅에서 자라난 붉은색 부겐베리아처럼.


출처 pinterest, Dubai tea house


 이전에 탔던 사람은 아마 데이트를 위해 향수를 걸치고 엘레베이터를 탔으려나. 혼자 추억에 잠겨 멀뚱히 서서 문이 닫히길 기다리는데 저 멀리서 손을 잡은 커플이 황급히 달려와 몸을 실었다. "와, 냄새 디게 좋다" 남자가 타자마자 하는 말에 여자친구가 긴머리채를 날리며 나를 힐끔 돌아본다. 8층까지 올라가는 내내 내 앞에서 둘이 손가락으로 서로 찌르고 속닥거리더니 문이 열리자 "니가 말해."하곤 여자친구가 남자친구를 살짝 밀었다. 남자친구는 기우뚱하며 내게 길을 비켜주면서 급하게 물었다. "저, 향수 이름이 뭐에요?" 어, 그게.... 내가 뿌린게 아니라고 말해야했지만 이미 아는 답이라 향수 이름을 얼른 알려주었다. "랑방이에요, 보라색 동그란 병이에요" "아, 랑방이요, 고맙습니다!" 남자친구 대신 명랑한 인사를 하고 쑥스러워하는 남자친구 팔을 끌고 호다닥 뛰어가는 커플을 보며 나한테 어울리는 향인가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웃었다.


 유니폼마다 색처럼 뭍어있던 동료들의 향수를 떠올렸다. 몇몇 친한 동료들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향이 있다.

 킴은 머스크 계열의 묵직한 빅터 앤 롤프의 플라워 밤이 어울렸다. 큰 키와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에 스모키한 눈화장을 잘하던 킴에겐 아시아인에겐 보기 드문 극강의 화려함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을 향수로 정점을 찍었다.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향기는 한번만 스쳐도 돌아보게 만들었다. 킴은 그런 여자였다.

 아사미는 아르마니 남자 향수인 아르마니 매니아를 썼다. 시원하고 깔끔한 향이 그녀의 도시적이고 단정한 이미지와 어울렸다. 유니폼 외엔 매니시한 일상복을 즐겨입던 것과도 어울렸다. 가녀린 손가락 끝엔 야무지게 네일을 칠하고 민낯으로 남자 셔츠같은 옷에 반바지를 입은 그녀는 향수도 남자 향수를 썼다. 그래서인가, 남자 보는 눈은 너무 없었다.

 회사에서 일년에 한번 듣는 교육이 있었는데 교육관 중엔 승무원 출신의 알제리 출신 교관이 있었다. 프렌치롤로 머리를 올리고 예의 그 낙타같은 눈썹을 마스카라로 완벽하게 올리고 누드톤 립이 잘 어울리던 중년의 여자였다. 그녀는 내가 첫번째 교육 때부터 마지막이던 9번째 교육까지 매해 보아왔는데 그때마다 교육 내용보단 그녀의 외모에 더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단순한 하얀 셔츠와 네이비색 긴바지인 교관 유니폼으로도 자신을 빛나게 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손목엔 까xx에 팔찌, 오x가 시계를 차고 교관임에도 여러개의 반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멋쟁이인 그녀가 맡은 교육이 서비스가 아닌, 안전교육이었다는 것도 그녀를 빛나게 하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안전 교육에 입어야하는 하얀 오버롤을 입은 승무원들과 거의 대부분이 남자 교관인 안전교육장에서 그녀는 외모로는 군계일학이었다. 비행기 기내와 똑같은 크기로 만든 기내 모형 안에서 큼큼거리며 그녀의 향수를 흠모하며 수업을 들었다. 샤넬이었다. 평소에 너무 짙어서 흡, 하고 숨을 참게 만드는 향이 교육받느라 거의 아무도 향수를 뿌리지 않았고 우리 무리를 전두지휘하는 그녀는 샤넬 몇 방울로 지친 심신들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머스크향도, 남자 향수도, 샤넬도 감행해봤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고 편안한 향수로 돌아왔다. 내가 당시에 쓰던 향수는 일년이 대부분 한계절인 두바이에서 늘 다른 계절을 꿈꾸며 짐을 싸던 방랑자의 마음이기도 했다. 계절과 성격, 장소에 어울리는 향이 각기 있다. 20대의 나는 나를 설레게 하는 것을 찾아다녔다면 마흔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나답게 하는 삶의 방식과 태도를 갖추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새로운 향수를 찾아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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