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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강 Mar 26. 2023

안락사 혹은 존엄사

고통의 끝

'나만 이 세상에서 없어지면' 이라든가 약도 내성이 생겨서 인간의 한계를 담굼질하는 통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자식과 주위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죽고 싶은 사람들.


캐나다에서는 메이드

( MAID:medical assistance in dying)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안락사 등록을 할 수 있다

과장을 해서 환자들이 재택 치료를 하면서 산소통을 정부에다 신청하는 것보다 시간이 훨씬 덜 걸린다고 한다. 짧으면 3개월 이내에 허가를 받을 수도 있을 정도로 신속하게 삶을 끝낼 수 있다. 동물병원에서의 안락사와 사람의 안락사는 존엄사의 개념이 더 많은 듯하지만.


사실 북미에서는 통증 완화 진료( pain management)는 최고로 발달이 되어 있어서 소수의 극한 통증자 외엔 강력 진통제를 써서라도  관리가 되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극심한 통증 외의 여러 가지 이유로 안락사를 원하는 케이스가 거의 90%라고 한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는 암말기 환자와 우울증 환자의 안락사 허용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암환자에게는 허용이 되고 우울증으로 죽고 싶다는 환자는 처음엔 안된다고 하다가 나중엔 극단적인 우울증 환자에게도 허용이 된 사례가 있었다.

우리가 접하는 유튜브나 블로그 등에서 극심한 통증과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죽고 싶다는  대부분의 사례가 안락사를 일반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농경사회에서의 대가족은 노인들을 돌보고 돌아가실 때에 임종을 지키는 것으로 존엄사에 대한 예우를 했다.

아무리 괴팍한 노인네였어도 일단 돌아가시면 덕담이 그치지 않고 고인의 좋았던 점만 자손들에게 알려주었다.

핵가족이 되면서 재산을 다 주면 길에서 죽고

안 주면 목 졸려 죽는다는 것이 유머로 회자되고 있는 세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핵심은 자본과 편리이다.

나는 남에게 무관심함으로 편해지고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나에게 불편을 주고 손해를 끼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싫어한다.

손절이 당연하고 무척 쉽다.

죽음은 애나 젊은이나 노인들을 가리지 않는다. 병도 마찬가지.

병에 걸리면 아무리 간단한 병이라 해도 누가  죽이라도 쑤어줘야 한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늙은 부모에게 이상 증세가 보이면 처음엔 불쌍해서 눈물 콧물 흘리다가

기간이 길어지면 경제적인 문제와 육신의 피로가 겹쳐 속으로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것이 진심일지도 모른다.

이런 낌새를  알게 된 환자들은 당장이라도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정말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절감하면서.


캐나다에서 그리 어렵지 않다 않다는 안락사는 여러 과정이 있겠지만  이를 승인하는 또 다른 의사의 리퍼럴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사람을 죽이는 의사에게 허락을 받아야 된다는 뜻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사람이 평탄하게 백수를 누려도 허무함만

남는데 병으로 인한 통증 자신이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이라는 극심한 자조를 극복하지 못해서 죽고 싶고 그 외에 수백 가지 살 수없는 이유가 많은 이 세상.


잘 알던 캐네디언 할머니가 꼬부라진 채 안 아픈 데가 없다면서 '나라에서는 자기가 죽기를 바랄 거라고 그래야 노인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들 테니까'라고 처연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고령화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이 시대에

 죽는 라이선스를 쉽게 내주는 정부는 진짜 돈을 안 쓰고 나라살림을 야무지게 한다고 해야 되나, 고통에서 구해주는 구원 프로그램을 돌린다고 해야 하나.

동양인들에겐 아직 생소하지만 언젠가 닥쳐올 문제라는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이런 영양제라도 먹으면 자율권을 주장하며 살 수 있을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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