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불평등
"엄마, 방금 봤어?"
선준이는 참 엄마를 귀찮게 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볼 때면 꼭 엄마를 끌어들입니다.
엄마의 시선을 독식하려 합니다.
자신이 본 것 그대로 엄마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싶습니다.
숙달된 조교처럼, 선준이가 저의 '시선'을 단속할 타이밍에 맞춰 선준이 전방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선준이의 흡족한 표정을 보면 제 마음도 즐거워집니다.
아마도 아이는 엄마의 '시선'을 먹고 자라는가 봅니다.
'시선의 보살핌'입니다.
제가 육아에서 '시선'의 중요성을 깨달은 건 '슈퍼맨이 돌아왔다' 때문이었습니다.
한 때 슈돌에 나오는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서 홀린 듯이 볼 때가 있었습니다.
슈돌을 보다가 '선준이도 저랬는데'하며 사진첩을 열어 아이의 어린 시절을 소환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내가 내 아이를 바로 앞에 두고, 과거의 아이 사진에 시선을 빼앗긴 건가?
너무도 어리석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부터는 과거의 선준이에게도 시선을 나눠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되도록 지금 내 곁에 있는, 실시간의 선준이가 엄마의 시선을 독차지하게 해주고 싶었으니까요.
아이들이 특히 어른들의 시선을 독식하는 곳은 '수영장'입니다.
저는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입니다.
어른들은 혹시나 아이가 물에 빠질 새라 온몸을 총동원합니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습니다.
저의 눈도 바삐 선준이를 좇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마음 한편이 너무도 시려옵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가 사무치게 그리워집니다.
수영장에 온 아이들은 무슨 복으로 이런 호사를 누릴까요.
쏟아지는 호의적인 시선들을 고루 분배할 순 없는 것일까요.
이 시선을 백분에 일만이라도 떼어내 시우에게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요.
시우는 2023년 '성경필사 고문'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로 언론에 조명되었습니다.
그 해 시우는 아동학대로 사망했습니다.
시우는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고 새엄마와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우는 눈엣가시가 되었습니다.
필리핀 유학 준비를 핑계로 홈스쿨링을 하며 학교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감시 카메라가 달린 좁은 방에서 시우는 이런저런 이유로 학대를 당했습니다.
아빠가 늦게 들어오는 것도, 새엄마가 유산을 한 것도 시우 탓이었습니다.
성경필사는 시우에겐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시우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일정 분량의 성경을 베껴 써야 했습니다.
다 채우지 못한 날에는 학대가 이어졌습니다.
온몸이 꼬챙이에 찔렸습니다.
시우의 몸에는 232개의 상처가 남았습니다.
그런데도 시우는 반항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일기는 매번 자발적인 반성문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치매에 걸리고 싶다"라고 시우는 썼습니다.
겨우 12살이었습니다.
시우는 키 148cm에 몸무게가 30kg이 안 되는 심각한 저체중이 되었습니다.
1년 동안 키는 훌쩍 컸는데 몸무게는 오히려 10kg 가까이 빠졌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린 시우는 동생의 사탕을 훔쳐 먹은 죄로, 돈을 훔쳐 편의점에 간 죄로 의자에 결박되었습니다.
시우는 사회적 시선에서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시우를 온종일 지켜본 건 오직 cctv 뿐이었습니다.
cctv에 찍힌 시우의 마지막 표정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직시할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시우에게 처음 시선을 준 날 저는 무기력한 어른이라는 죄로 하루 밤을 꼬박 앓았습니다.
시선의 불평등은 도대체 무슨 기원일까요.
도대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까요.
과거에도 지금도 저는 도통 답을 모르겠습니다.
수영장에 갈 때마다 시우를 그저 추모하는 걸로 저는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시우와 정인이, 그리고 이름 모를 아이들을 평생 그리워해야 하는 건 어른들의 책무일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우리의 아이입니다"
수행문을 되뇔 때면 가슴 한편이 바스러집니다.
무기력한 어른이 받는 형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