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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엄마, 아이의 아이

업장소멸

by 황보람



엄마의 엄마는 엄마인데, 왜 엄마는 엄마한테 그렇게 해?


암호 해독문 같은 질문을 단박에 알아들은 건, 제가 엄마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평소 뜨끔해하던 일이었기 때문일까요.


어쨌거나 저는 암호를 즉각 해독했습니다.

풀어 보자면 이런 말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존재는 이렇게 좋은 건데 왜 당신은 당신의 어머니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합니까?"


수행하기 이전이었다면 어떻게 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암호해독 자체에 실패하거나, 포기하거나 혹은 못 알아들은 척했을지도요.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건 엄마가 나빠서 그래"


써놓고 보니 그 '엄마'가 저인지, 저의 엄마인지 좀 헷갈리네요.

하지만 아이도 중의적 표현을 단박에 알아들었습니다.

그 좋은 '엄마'라는 존재에게 모질게 대하는 딸이 있다면, 딸이 문제인 건 당연하니까요.


저는 반복해서 '엄마'라는 존재를 해독해 왔습니다.

정확히는 '나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태생적 탐구였습니다.

어렸을 적 상처들을 풀어내는 한풀이가 필요했던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결국 에세이를 써 내려가면서 존재론적 해독에 성공했습니다.

성공한 줄 알았습니다.


저의 에세이 <저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오랫동안 사과와 용서라는 성립되지 않을 수식을 갖고 도무지 결론을 낼 수 없는 스토리를 붙잡고 있었다. 죽음에게로 미뤄왔던 결론을 이제는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아이가 의도치 않게 이 스토리를 상속받을지도 모른다. 종지부를 찍을 안전한 반전이 필요했다. 그리고 찾아냈다. ‘놓아 버림’. (중략)


붙잡고 있었던 건 나였다. 무신경한 손은 단 한 번도 나를 붙잡은 적이 없었다. 내가 놓으면 다 끝나는구나.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반전이었다. 피해자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가해자에 가까웠다. 무신경한 손은 그저 무신경할 뿐이었다. 스토커는 나였다. _황보람의 저니 | 편않 119p-120p


엄마를 가해자 자리에 두고, 스토킹 하던 건 저였습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저는 영원한 굴레일 것 같았던 '엄마'라는 주술에서 풀려났습니다.

풀려난 줄 알았습니다.


저는 한동안 저의 집착을 놓아버린 순간을 '업장소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자유로웠고, 개운했으니까요.


그런데 그 자유는,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것과 같은 막막함이기도 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나고 보니,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 있었다...라고나 할까요.

저는 그 막막함을 부러 외면하며 깊은 굴 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것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며칠 전 일입니다.

108배를 하다 불현듯, 왜 이제껏 나의 자유가 막막했는지 선명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참회의 마음도 없이 절을 하고 있는데 너무도 자연스럽게 깨달음이 제 무릎을 두드렸습니다.

머리를 땅에 대는 순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나의 업장소멸은 반쪽짜리였다.


감옥에서는 풀려났지만, 저는 전자발찌를 착용한 상태였던 겁니다.

형기 만료로 출소했지만, 재범 우려가 남아있었습니다.

진정한 참회에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합장을 하고 서 있는데 빠르게 생각들이 지나갔습니다.


만약 어린 시절 내가 아무 고통도 괴로움도 겪지 않았다면

내 생에 가혹함이랄 게 전혀 없었다면

그래서 그로부터 벗어나려고 모진 애를 쓰지 않아도 됐다면


혹시 그랬다면


나는 너무도 쉽게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너무도 쉽게 아이를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아무 두려움 없이 내 성질대로 아이를 키웠을지도 모르겠다.


수행할 이유도 전혀 없었을 것이고

에세이 같은 걸 쓰며 방황하지 않았을테고

방황한다 한들, 그 종착역이 '수행'이 아니라

'커리어'나 '성공'따위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나의 예민함을 길들이지 않고

아이에게 쏟아냈을 지 모르겠다.


생각이 끝에 한문장이 남았습니다.


내가 어려서 받은 고통은

어린 아이었던 내가, 지금의 나의 아이 대신 받은 것이다.


관점이 전환되자 그동안의 이해도 완전히 전복되었습니다.


내가 엄마로부터 받은 상처 덕분에,

나는 내 아이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었던 거라고


나의 엄마는 자신이 가해자가 됨으로써,

딸이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막아 준 거라고


어린아이였던 내가, 지금의 내 아이를 지켜주었던 거라고.


그 아이의 외로움 덕분에

지금 내 아이가 웃을 수 있는 거라면

그 외로웠던 순간들 마저도 사실은 복을 받았던 시간이었다고


이런 생각에 이르자

그 아이도 사실은 부처였구나...

돌이켜 알아차려집니다.



언제나 뾰로통한 표정이었던 그 아이.

그 아이는 자신을 '쓰레기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텅 빈 쓰레기통.

쓰레기조차 들어있지 않은 텅 빈 쓰레기통이었습니다.

거리에 텅 빈 쓰레기통을 보고 사무치게 서러웠던 그 마음

그것도 부처의 마음이었겠구나


아이는 자라서 이렇게 스스로 업장소멸을 해 나갑니다.

자신의 아이를 또 부처 삼아 배우며 어른이 되어 갑니다.


이제 저는 재범 확률이 전혀 없는 모범수로 석방되어, 3.1절 특별사면까지 받았습니다.

진정한 자유입니다.


아침을 먹는데 선준이가 또 질문을 던집니다.

베이비 붓다의 법문 시간입니다.


"엄마의 가족 중에 누가 왕인지 알아?"


마음속으로는 '할머니'라고 생각했지만, 더 실리적인 답안을 제시했습니다.


"선준이가 왕이지"


왕자님에게는 할미 마마도 아무 힘도 못 쓰니 왕은 당연히 '선준이'입니다.

그런데 왕자님의 답은 달랐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왕이지. 봐봐. 엄마의 엄마가 엄마를 낳았지? 엄마가 나를 낳았지? 그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왕이지"


시리얼 한 사발을 앞에 두고 아침부터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아이에게 얼마나 더 배워야 저는 떳떳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선준이가 이토록 사랑하는 엄마를 낳아준 그 엄마를 선준이가 그토록 사랑하는 건 너무도 필연적입니다.

제가 이토록 사랑하는 선준이를 세상에 있게 해 준 건 제가 아니라 저의 엄마였습니다.


왜 '엄마'라는 1차식으로는 몰랐을까요.

선준이를 끼고 '엄마의 엄마'라는 제곱으로 올라가서야 알았습니다.

한 때 너무도 원망했던 엄마가, 이제 '엄마의 엄마'가 되어 저에게 돌아옵니다.

'엄마의 엄마'에게 이제야 제대로 된 참회를 드립니다.


이렇게 선준이는 엄마를 구원하고,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구원하고, 어린 시절 그 아이는 미래의 자신의 아이를 지켜냅니다.


한순간 산이 무너지듯 끝난 줄 알았던 업장소멸이 이렇게 봄눈 녹듯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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